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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마티앙 신부

룸베크서 만난 존 마티앙 신부

그는 내전의 상처가 깊은 자기 나라 아이들에게, 또 좌절하고 포기하려는 다른 나라 사람들에게 하고 싶은 얘기가 있다고 했다.

 

“고통스럽겠지만 어려운 시기는 결국엔 지나갑니다. 새로운 시기가 옵니다. 지금의 나의 모습과 상황으로 판단하지 마세요. 내 경험이 그걸 말해주고 있지 않습니까?”

 

아랍계 북수단과 가톨릭·토착신앙을 믿는 남수단의 유혈 내전이 한창이던 1987년. 겨우 11살이던 그는 그때부터 북수단에 대항한 남수단 ‘수단인민해방군’ 밑에서 군사교육을 받으며 소년병으로 키워졌다. 남수단 룸베크의 고향 마을에서 ‘수단인민해방군’ 캠프가 있는 에티오피아까지 3개월을 걸어서 이동하는 동안, “소년병으로 차출돼 같이 가던 아이들이 초원에서 굶주림과 질병으로 많이 죽었다”고 했다. 다행히 그는 인민해방군 캠프에서 군사교육만 받은 게 아니라 영어와 수학도 배웠다고 했다. 그는 93년에 또래 아이들과 걸어서 케냐 북쪽 지역인 카쿠마 난민캠프로 생존을 위한 이동을 감행했다. 이곳에서 부모 없이 홀로 5만명이 넘는 난민들과 지낸 그는 배움을 포기하지 않고 난민캠프 학교에서 중·고등학교 과정까지 마쳤다. 이후 그는 남수단 룸베크의 가톨릭 교구의 지원으로 케냐 나이로비와 이탈리아 로마에서 신학교육을 받아 2010년 9월 사제가 됐다.

 

지난달 21일, 아프리카 남수단 룸베크에서 만난 존 마티앙(36·사진)은 남수단 최대 부족인 딩카족 출신으로는 28년 만에 배출된 신부다. 남수단은 2005년 내전이 끝난 뒤 2011년 7월 수단에서 독립했다. 남수단의 딩카족들은 소년병에서 평화를 전하는 신부가 된 그를 자랑스럽게 여긴다고 한다. 그의 사제 서품식엔 고 이태석 신부가 남수단 톤즈에서 가르친 ‘돈 보스코 밴드’도 참석해 축하연주를 했다.

 

 

11살때 인민해방군서 군사교육
17살때 케냐 난민캠프로 도망쳐
홀로 중·고 마치고 신학도로 성장
28년만에 배출된 딩카족 신부 돼

 

“고통스러운 시기는 결국 지나가 국제사회 남수단 교육에 관심을”

 

 

그는 “이제 남수단 스스로 법과 제도를 정비하고 나라를 재건하는 노력을 할 수 있게 됐다”면서도 “가축을 뺏기 위한 부족간 싸움이 남수단 내부의 심각한 문제로 드러나고 있다”며 안타까워했다.

 

남수단 종글레이 주에선 지난해 3월 소를 훔치려는 부족간 총격전으로 200명 이상이 숨졌고, 12월엔 톤즈와 아강그리알 지역 부족들 사이의 총격전으로 수십명이 목숨을 잃었다.

 

우유와 고기를 제공하는 소는 남수단 부족에게 부의 상징인데다, 여자 쪽 집에 소를 주고 여러 아내를 맞아들일 수 있는 결혼 풍습 때문에 소를 더 차지하려는 싸움이 빈번하게 발생한다. 남수단에선 결혼 전에 남자가 여자네 집에 보통 15~20마리의 소를 건넨다. 또 ‘신’이 딩카족의 가축을 뺏으라고 용인했다는 전설을 믿는 누에르족이 딩카족과 벌이는 가축 쟁탈전을 신이 허락한 싸움으로까지 여기면서 이들 부족간의 충돌도 계속되고 있다.

 

마티앙 신부는 “남수단엔 원유·철 같은 지하자원이 풍부하지만 이를 개발할 기술이 없고, 도로 시설, 제조품을 생산할 공장이 없는 것도 문제”라고 했다. 남수단 전역은 비포장 흙길이고, 대부분 지역에 전기가 들어오지 않는다. 대도시를 벗어나면 마땅한 감옥시설도 없어, 땅에 줄만 그어놓고 그 안에 범죄자를 가둬두고 감시하는 등 치안 체계도 잡혀 있지 않다. 철기시대처럼 수렵용 창을 든 아이들과 휴대전화를 가진 청년들이 공존하고 있다. 또 남수단 정부는 예산의 90%를 원유 수출에 의존하지만, 분리독립 이전의 북수단에 있는 송유관과 정유시설을 통해 원유를 수출해야 해서, 이에 대한 사용료를 둘러싼 문제도 골칫거리다.

 

마티앙 신부는 “북수단에 비해 교육에서 소외됐던 남수단 아이들의 교육문제에 정부와 국제사회가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교육받은 사람이 나라의 희망”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소떼를 모는 목동 일을 하거나, 초등학교 학비(1년 50파운드·약 1만5000원) 부담 때문에 학교에 가지 않거나 중도에 포기하는 아이들이 이 나라엔 여전히 많다. 그는 “내가 많은 사람들의 도움으로 신부가 됐듯, 나도 남수단 아이들에게 희망을 주는 사람이 되고 싶다.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지 분별이 없는 아이들에게, 어떤 것이 정의인지 가려낼 수 있는 힘을 ‘우리’가 줘야 하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룸베크(남수단)/글·사진 송호진 기자

 

dmzso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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