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복자 요셉 알라마노의 한 인간에 관한 소박한 일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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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 북쪽에 토리노市로부터 30Km쯤 떨어져 있는 카스텔누오보 돈 보스코라는 농촌은 많은 성인들의 유명한 고향이다. 바로 그 곳에서 요셉 알라마노는 1851년 1월 21일에 출생하였다. 다섯 형제들 중 네째인 요셉 알라마노는 그가 막 세 살이 되던 해에 아버지를 잃었고 그 때부터 집안은 어머니와 맏형이 꾸려 나갔다. 그는 유년기를 탁아소와 마을에 있는 국민학교를 오가면서 보냈고, 자유시간에는 종종 가축들을 이끌고 목초지로 가곤 하였다.


cstn01[1].jpg그는 집에서 홀로 공부를 계속하면서 진실하고도 결정적인 결심을 하게 된다. 즉 토리노 교회에서 사목할 사제가 되기 위하여 신학교에 입학하는 것이었다. 어머니는 그 결정에 매우 기뻐하였으나 형제들은 반대하였다. 그들은 그가 먼저 공립 고등학교에 진학하기를 바랬었다. 요셉은 심사숙고한 끝에 결정적으로 다음과 같은 말을 하였다: "주께서 오늘 나를 부르신다. 2년, 3년 후에도 계속해서 나를 부르실지 모르겠지만...!" 그리고 그는 토리노 신학교에 입학하였다.

call01[1].jpg몸이 허약했던 그는 신학교에 입학한 지 일년째 되는 해에 중병에 걸렸고, 그로 인해 너무 허약해져서 평생 병고에 시달리게 된다. 비록 신체는 허약하나 강인한 정신력을 지닌 그는 정열적으로 기도생활에 전념하였다. 그는 사제직에 관하여 아주 고양된 의식을 가진 학생이었다. 따라서 그는 다음과 같은 좌우명을 스스로 만들었다: "선하게 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성스러워라. 기다리지 말고 행하여라."
1873년 9원 20일 그는 토리노 대성당에서 사제품을 받았다. 그 때 그의 나이 22살이었다. 그는 시골 사람들 사이에 섞여  살면서 그들을 사목하고 싶어했다. 그러나 사제들의 교육자로서의 그의 재능을 발견한 가스탈디(Gastaldi)대주교는 그에게 신학교에 남아서 신학생들을 지도하고 정신적 지도자가 되어주도록 부탁하였다.

그에게 처음 몇 년간의 사제직분은 너무나 힘이 들고 벅찬 것이었다. 그는 신학생들을 돌보아야 했고, 콘빗토(Convitto)에서 사제로서 거쳐야할 과정을 이수해야 했으며 신학박사 학위를 취득하기 위하여 부단히 연구하고 노력을 경주해서 교황청 내에 개설된 신학과정(Facolta' Teologica Pontificia)의 입회를 위한 마지막 시험에 통과하여 신학 아카데미회의 일원이 되었다.

scon01[1].jpg1880년에 9월에 대주교가 알라마노에게 꼰솔라따 대성당의 신부겸, 은퇴 사제들을 위한 휴양소의 책임보직을 맡기려고 그를 불렀다. 알라마노는 이 보직의 복잡성과 미묘성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대주교에게 "내게는 무척 버거운 짐입니다. 그러나 순명이라는 계명을 위해 그 곳으로 가겠습니다." 라고 응답했다.

꼰솔라따 성당의 주임신부와 종교 교육장의 책임자, 성 이냐시오 성당의 사목자라는 직분은 한 인간의 전 생애를 바쳐 이루기에 벅찬 사업이었다. 그러나 그는 스스로 사제임을 자각하였고, 그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직분은 정신적 지도였다. 그는 고해소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곤 하였다. 즉 그는 주교들, 사제들, 그리고 기타 종교단체들의 정신적인 조언자였던 것이다. 또한 그는 카톨릭 봉사 단체, 노동자, 여성, 젊은이들의 신심 단체들을 후원하고 그들의 정신적 지도자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