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혹적인 발자취... (한국 지부 25주년 -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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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 19 b.jpg

 

매혹적인 발자취...

강 디에고 신부 IMC

 

 

들어가는 말

  p 19 c - 1987년에 로마에서 한국 파견을 받으셨던 우리 첫 선교사들의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와의 만남.jpg


로마의 파업 때문에 도교에서 서울로 가는 비행기를 놓친 우리는 하루 뒤 아무도 우리를 기다리지 않는 늦은 밤에 공항에 도착했습니다. 그러나 그 때문에 우리는 첫 순간부터 한국 사람들의 친절과 도움 그리고 완벽한 조직력을 경험할 수 있었습니다. 안내 데스크의 아가씨가 환한 미소로 우리가 내민 작은 형제회의 전화번호로 전화를 걸어 우리가 찾아가야 할 수도회의 위치가 어디인지 파악했고, 공항 건물 출구에 정확하게 택시가 오도록 조치했습니다. 덕분에 우리는 30분 안에 작은 형제회 건물에 도착할 수 있었는데 그 때 시간이 자정이었습니다. 스페인 출신인 지부장 배이티아 신부님이 “한국에 있는 여러분의 집에 오신 여러분을 환영합니다!”라는 인사말로 우리를 맞아주었습니다.

25년이 지난 지금 돌이켜 보면 참으로 ‘매혹적’인 한국에서의 우리 수도회 역사는 1988년 1월 20일 그렇게 시작되었습니다.

 

한국말, 김치 그리고... 환상적인 이야기의 시작

당시 한국은 스스로 민주 정부라고 내세우지만 아직 진정한 민주주의와는 거리가 있었던 정부에 반대하는 학생들의 시위가 잦았습니다. 시위대들을 향해 경찰이 쏜 최루탄 가스로 공기가 가득했던 것이 기억나는데 우리는 손수건으로 입을 막고 눈물을 닦으며 연세대학교에서 있었던 한국어 강의실에 도착하곤 했습니다. 그런 현실 앞에서 어느 샌가 우리는 어쩌다 이런 곳에 오게 되었는지 자문하게 되었습니다.

사실 아시아로 파견된 우리들의 준비 과정은 체계적인 것과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한국으로 파견되기로 결정된 네 사람은, 로마의 본원에서 서로를 알고 형제애를 키우기 위해 2개월 동안 함께 지내면서 애타게 한국 입국 비자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때 우리가 한 일은 한국의 사회, 정치, 문화적 상황에 대한 글을 읽거나, 우리를 받아주기로 한 인천교구장 나 굴리엘모 주교님과 서신을 교환하는 것이 전부였습니다.

 

당시 우리는 당연히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 하기를” 꿈꾸고 있었고,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큰일을 할 수 있기를 기대했습니다. 동시에 피상적인 지식으로 신비스런 호기심만 가득했던 유교와 불교, 무술 신앙과의 만남 등 아시아의 대종교와의 만남을 꿈꾸곤 했습니다. 지역 교회에 우리 수도 생활의 증거의 삶을 제공하리라는 꿈에 부풀어있었고, 당시만 해도 접근하기 어려웠던 중국과의 가교 역할을 할 수 있으리라는 꿈도 가지고 있었습니다. 무엇보다도 당시 아직 국민의 3%에 지나지 않았던 지역 교회가 수적으로나 질적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큰 도움을 줄 수 있으리라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최루탄 가스의 매캐함 속에서 우리의 그런 꿈이 어디로 사라졌는지 자문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한국말 역시 우리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어렵다는 것을 깨닫는 데에도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는데, 어느 정도 불편을 느끼지 않을 때까지 4-5 년 동안의 끊임없는 노력이 필요했습니다. 음식과 생활방식과 관습에 적응하는 것도 많은 인내를 요구했습니다. 지금은 진정으로 ‘김치도 맛있다.’고 말할 수 있지만 당시만 해도 솔직히 내 일생 동안 결코 이 말을 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당시 한국은 경제적으로 완전한 성장기에 있었고, 가난한 사람들은 빠르게 ‘사라지고’ 있었습니다. 작지만 건실하고 잘 조직된 교회는 이미 본당을 위한 사목 역량이 충분했고, 활동력이 있는 평신도의 수도 많았습니다. 신학교는 신학생들로 초만원이었고, 외국인 선교사들에게 맡겨야 할 본당은 없었습니다! 자연스레 또 다른 의문들이 솟아났습니다. ‘어쩌다 이런 곳에 오게 되었는가?’ ‘한국에서 우리 선교사들의 위치는 무엇인가?’ ‘아시아에서의 선교 사업? 하지만 어떤 형태의 선교사업을 해야 하는가?’

 

천사들과 친구들과 도움을 준 사람들

지역교회가 우리를 본당 사제로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것, 가톨릭교회의 사회사업이 수녀님들이 운영하는 장애인, 고아, 병원, 노인요양 사업 등으로 잘 조직되고 효과적이라는 것, 한국 사회가 아프리카나 남아메리카처럼 학교와 병원들을 건설하는 데에도 우리를 필요하지 않으며 따라서 우리의 전통적인 선교사 상을 이곳에서 실현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확인한 우리는 위기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그 위기는 매우 유익한 위기였습니다. 당신의 계획을 따르는 데에 더욱 자유롭고 유연하게 하기 위해 하느님께서 우리의 계획과 꿈을 거두어들이시고 우리를 정화하고 계시다는 것을 깨닫고 그 사실을 받아들였기 때문입니다. 전형적이고 고전적인 방법을 빼앗긴 우리는 복자 요셉 알라마노께서 우리에게 전해주신 카리스마의 아름다움과 부유함과 유효함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것은 “여러분들은 비 그리스도교인들을 위한 사람입니다.” 라는 것이었습니다. 문제는 비 그리스도교인들을 위해 어떻게 존재해야 하는가 하는 것만 깨달으면 되는 것이었는데 그것이 쉽지 않았습니다. 그런 의문을 가진 채 1992년 재의 수요일에 루이스 신부님과 저는 동인천 만석동의 한 작은 주택으로 이사를 하게 되었는데 그 집은 주변의 집들과 꼭 같은 작은 가정 주택이었습니다.

 

몇 명의 외국인 신부님들이 함께 살면서 가까운 본당에서 활동하던 우리의 모습은 가톨릭 신자들 사이에 커다란 호기심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우리가 살던 집으로 방문하는 사람들이 끊이지 않았는데 교리교사들, 레지오 마리에의 여성 회원들, 본당 성가대 회원들, 개인적으로 찾아오는 사람들과 친구들이 끊임없이 이어졌습니다. 변변치 못한 우리의 한국어로 얼마나 많은, 호기심 어린 질문에 답을 해야 했는지요!

“네, 우리는 각기 다른 나라에서 왔습니다.” “예, 우리는 함께 살고 있어요. 그런데 보통은 서로 싸우지 않고 사이좋게 지냅니다.” “네, 유럽에도 사 계절이 있습니다. 수박도 있어요.” “예, 김치 맛있어요!" (하지만 당시 이 말은 반은 거짓말이었습니다!)

 

당시 모니카라는 본당 신자는 자주 우리에게 자동차 봉사를 해주었습니다. 시장을 보는 일이나 공항으로 방문객을 마중 나가는 일, 심지어 공동체 식구들이 여름 휴가를 보내기로 한 곳까지 데려다 주기도 했습니다. 택시 기사 일을 하던 분도라는 분은 창문이 잘 닫기지 않는다든가 감실을 한국적으로 만드는 일 등 매일매일 우리가 만나는 구체적인 어려움들을 도와주었습니다. 프란체스카와 소피아 그리고 많은 교리교사들은 우리가 쓴 강론의 한국말을 고쳐주기도 했습니다.

 

정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우리를 도와주었는지요! 그분들은 하느님께서 우리를 홀로 두지 않으시고 우리를 버려두지 않으셨다는 것을 믿도록 하기 위해 주님께서 보내주신 천사들이었습니다! 그러는 동안 박호 신부님과 알바로 예페스 신부님은 부천시 역곡의 전세 집에 머무셨습니다. 우리는 후원회를 시작하기 위해 많은 사람들과 관계를 맺고자 했는데, 그런 상황에서도 선교활성화를 위한 가능성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원하는 사람들을 위해 한 달에 한 번씩 양성 모임을 시작했고, 피정도 했습니다. 초등학교 중학교 교리반 학생들을 위한 월례 선교 모임도 시작했습니다. 

 

마침내 후원회도 만들어졌습니다! 외국인들에게는 불가능하던 시절, 알바로 예페스 신부님이 결국 해내고 말았습니다. 아직 공식 구좌를 받아본 적이 없었던 다른 수도회의 큰 놀라움 속에  ‘공식적인’ 은행 계좌번호를 받아내는 데 성공한 것입니다. 이를 통해 우리 회원들은 지속적이고 놀라울 정도로 풍성한 기여를 해주기 시작했는데 그 이후부터 많은 발전이 이어졌고, 수많은 신기록들이 이어졌습니다.   

 

무엇보다도 역곡에 우리의 본원을 건설한 일을 들 수 있습니다. 그 무렵 하느님이 보내신 천사의 부르심에 김요셉이라는 분이 응답을 주셨는데 우리를 대신해서 건축공사를 도맡아 보살피는 일을 맡아주셨습니다. 그리고 일찍이 들어본 적이 없는 일이 일어났는데 호기심과 큰 관심을 가지고 다가온 한 젊은이가 어느 날 ‘우리처럼 될 수 있는지’ 물었습니다. 그 젊은이로 인해 일반적인 양성과는 차원이 다른 성소를 분별하는 일이 시작되었습니다.  바오로에 이어 또 다른 젊은이가 따랐고, 계속해서 다른 젊은이들이 뒤를 이었습니다. 불행하게도 꼰솔라따의 선교사가 되고자 했던 한국의 첫 후보자들은 그 후 모두 떠났지만 그들은 한국의 학생들에게 어떤 양성이 필요한지 깨닫게 하는 기여를 했습니다.

 

이 무렵 선교 활동을 더욱 활성화하기 위해 어떤 방법을 가야 할지를 선별하는 과정에서 우리는 한국의 ‘백성’을 향한 선교 잡지를 발간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이것은 우리의 친구들을 위해서뿐만 아니라, 가까운 이들에게는 복음을 선포하는 데에 매우 적극적이었지만 하느님으로부터 먼 이들에게는 매우 소극적이었던 한국 교회 전체에도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이는 선교활성화를 위한 수단일 뿐만 아니라  젊은이들을 선교 성소의 아름다움에로 이끄는 데에도 필요한 것이었습니다.


25주년 앨범 (1/3)

1988년


1월 한국 도착.jpg 6월 꼰솔라따 대축일.jpg 10월 연세대에서.jpg

1989년

역곡 옛 공동체.jpg 총장 신부님의 방문.jpg

1990년

꼰솔라따 대축일.jpg 나 굴리엘모 주교님의 방문.jpg 양 바오로 신학생과의 소풍.jpg

1992년

우리 회원들과 함께.jpg 꼰솔라따 대축일.jpg 만석동 회원들과 미사.jpg 만석동 회원들과 함께.jpg 안토니오, 박호, 루이스, 남 요한 바오로, 디에고와 알바로 예페스 신부님들의 설악산 소풍 중.jpg 역곡 본원 머릿돌 축복식.jpg 인천 만석동.jpg

1993년

꼰솔라따 대축일 1.jpg

꼰솔라따 대축일 2.jpg 꼰솔라따 대축일 3.jpg 나 굴리엘모 주교님의 만석동 방문.jpg 역곡 본원 축복식.jpg 역곡 본원.jpg

1994년


라파엘 신부님과 벤자민 신부님.jpg 성탄 월례회 1.jpg 성탄 월례회 2.jpg

1995년

만석동에 부총장 신부님의 방문.jpg

우리 공동체.jpg 잡지의 편집자들.jp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