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05~06호

08-알라마노의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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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라마노의 영성
알라마노의 사랑
마리오 바르베로 신부 IMC

알라마노를 알게 된 사람들은 모두 그분이 착하고, 평화로웠으며 사랑할 줄 아는 분이었다고 기억합니다. 그분의 애정은 활기에 찼으며 균형을 이룬 것이었습니다. 이는 신학 교 교육 과정에서 더욱 두드러지게 되었는데, 그 당시 신학교 교육은 거대한 이상과 훈련 중 에 이루어졌고, 매우 엄격한 편이었습니다.

알라마노의 사랑의 표현은 매우 균형이 잡 힌 것이었습니다. 우선 어머니와 관계에서 볼 때 이 같은 사랑이 드러났는데, 그의 어머니는 온 마음 다해 그를 사랑했습니다. 이에 대해서 는 모두의 증언이 일치합니다. ‘그는 자기 어 머니를 매우 깊이 사랑했습니다.’‘항상 깊은 존경심을 가지고 어머니에 대해 이야기했습니 다.’“성녀 같은 나의 엄마”라고 그는 말하곤 했습니다. ‘그는 초등학교를 졸업한 후 공부 를 계속하고 싶었습니다. 그렇지만 엄마를 떠 나야 한다는 생각에 마음이 아팠는데, 그는 엄 마에 대한 애정에 집착되어 있었습니다.’‘알 라마노의 집은 손님대접을 무척 잘 해주는 가 정이었고 모든 친구들이 알라마노의 집에 기 꺼이 모여들었습니다. 그곳에는 따뜻하고 너 그러운 분위기가 감돌았고 어머니는 이들이 성스러운 기쁨과 건전한 오락을 즐기는 것을 보고 기뻐했습니다.’이 같은 가족적이며 평 화롭고 따뜻한 환경은 젊은 요셉 알라마노의 심리적이며 정서적인 성장에 건전한 영향을 주었을 것입니다.

알라마노의 정서적 형성에 두 번째로 좋은 영향을 주신 분은 유아학교의 베네딕타 사비 오 선생님이셨습니다. 이 여성은 마음이 아주 넓었으며, 알라마노의 삼촌인 카파쏘에게서 영신적 지도를 받았습니다. 그녀에 대해서는 ‘본성적으로 사랑이 넘치고 매우 활기찬 성품 을 지니고 있었다’고 사람들은 말했습니다. 이 선생님은 자신의 옛 제자 알라마노를 잊지 않으셨습니다. 그리고‘알라마노와 구체적인 협력관계를 유지하면서 깊은 존경심을 지니고 방문도 하고, 편지도 교환했으며, 카파쏘에 대 한 기억을 수집하기도 했습니다.’

카파쏘는 하느님의 자비를 강조했고 그분에 게 스스로를 내맡겨야 한다고 계속 알라마노 에게 교훈을 주었으며 이는 알라마노의 영신 적 성장에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

이 노선을 따라 알라마노는 긍정적 사고방 식을 키워갔으며, 영웅적 방식으로 희망의 덕 을 실천하기에 이르렀습니다.

끝으로 알라마노가 일생을 통해 소중히 여 겼던 여러 사람들과의 진실한 우정들은 알라 마노의 사랑을 성숙시키는 데 분명 깊은 영향 을 주었습니다. 우리가 알고 있듯이, 우정은 사랑의 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도들과 대 화하시면서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너희를 더 이상 종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나는 너희를 친구라고 불렀다”(요한 15,15).

알라마노의 가장 가까운 친구들은 그의 신 학교 동기들이었습니다. 그들 중에는 피에트로 칸 타렐라, 몬도비의 주교 조반니 바티스타 레씨아 몬시뇰, 존경받던 신학 교수이며 투린의 대주교 였던 아고스티노 리켈미 추기경이 있습니다.

7-1.jpg 그러나 모든 분들 중 알라마노는 자코모 카미 자싸 신부님과 가장 뚜렷 한 우정을 지녔는데, 그 분은 성지의 협조자였고 42년 간 꼰솔라따회 신학교 대학원에서 함께 일하셨습니다. 알라마노는 카미자싸 신부님께 자신의 협력자가 되어줄 것을 청했다는 사실 을 공표하는 편지에서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나의 사랑하는 친구여, 나는 우리가 함께 얼 마만큼의 좋은 일을 하게 될 것을 믿는 바이 네.”카미자싸 신부님에 대해서는‘단지 단순 한 직원이나 협력자로 생각할 수 없고, 오히려 자신의 오른팔이며, 친구요, 신뢰자이며 형제 였다’고 말했습니다. 우리의 선교 가정이 이 사제적 우정에서 태어났다고 생각할 때 무척 아름답습니다. 두 분은 매일같이 오래 동안 담 소했고, 소감들을 교환했습니다. 이는 유효한 대화로서 새로운 발전을 낳았습니다. 카미자 싸 신부님이 케냐를 방문하러 가셨을 때, 그의 친구 알라마노는 매우 긴 편지를 보내서 아프 리카에 있는 그분의 젊 은 선교사들 곁에 어느 모로든 자신의 현존을 느낄 수 있게 했습니다. 이 상호보완적 협조, 상 호교환의 가능성은 서로 를 지켜주는 힘이 되었 습니다. 그리하여 성지 는 꼰솔라따께 대한 사 랑의 쇄신된 본부가 되 었고, 선교 전파의 중심 이 되었습니다. 즉 사랑 은 번져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