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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 교 체 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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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릴로 악셀로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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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릴로 악셀로드 신부님 전기(傳記)의 표지
아주 특별한 선교사 - 상
조르조 바르나델리 (Mondo e Missione)
우리는 모든 사람이 인간의 오감을 모두 다 쓰고 있지 못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이런 사람들을 복음화하는 문제는 많이 이야기하지 않는다. 그래서 남아프리카 출신 한 사제의 특별한 이야기를 소개하고자 한다. 그는 귀머거리로 태어나 몇 해 전부터는 시력마저 잃었지만 귀머거리와 맹인의 언어로 복음을 선포하는 일을 계속하고 있다. 그의 이야기를 잘 소개하는 것은 가치가 있는 일인 만큼 두 번에 걸쳐 소개하고자 한다.

--- (편집자)

치릴로 악셀로드는 여러 해 동안 다수인 흑인들을 차별하며 백인을 우대했던 체제인 아파르트헤이드 시대에 남아프리카에서 태어났습니다. 백인이었던 그는 억압적이고 부당한 그 체제에 대항해 싸우는 일에 투신했는데 1942년 케이프타운에서 동유럽의 박해를 피해 남아프리카로 이주한 정통 유대인 가정의 외아들로 태어났습니다. 귀머거리로 태어난 그는 여러 해 뒤, 시력까지 완전하게 잃게 하는 우셔 병에 걸렸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어린 시절부터 그는 어려운 장애를 뛰어넘어야 했는데 당시 케이프타운에는 귀머거리 어린이를 위한 학교는 독일 출신 도미니코회 수녀님들이 운영하는 학교가 유일했습니다. 독실한 유대교 가정이었던 엑셀로드 가족들에게 외아들을 가톨릭 학교로 보낸다는 것은 그가 가톨릭교회에 대해 너무 많은 것을 배우게 되지 않을까 하는 걱정 때문에 힘든 결정이었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유대교 공동체가 귀가 들리지 않는 유대인 어린이들을 위해 유대교의 율법인 토라를 가르칠 수 있도록 압력을 넣었습니다. 어린 치릴로는 귀가 들리지 않는 사람들을 도와주기 위해 랍비가 되기를 바랄 정도로 열정적으로 토라를 배웁니다. 그러나 머지 않아 장애물을 만나게 되는데 정통 유대인들이 제시한 토라의 해석은 장애인이 랍비가 될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그에게 매우 큰 충격이었는데, 그로부터 얼마 뒤그는 더 큰 충격인 아버지의 죽음을 맞이하게 됩니다. 결국 회계사로 일을 하기 시작한 뒤에도 그는 다른 사람을 위해 완전히 자신의 삶을 바치겠다는 열정을 잃지 않습니다.

“사제가 되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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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각장애 아이들(남아프리카)

그러던 어느 날 젊은 치릴로는 호기심에 이끌려 케이프타운의 가톨릭 대성당에 들어가게 됩니다. 그리고 가톨릭 신자이면서 귀가 들리지 않는 한 친구의 도움으로 하느님과 가톨릭 신앙에 관한 탐구의 여정을 시작하게 됩니다. 그 후 그는 귀가 들리지 않는 사람들을 위한 미국 유일의 가톨릭 대학교였던 갈로뎃 대학교에서 철학과 역사학을 전공합니다. 어느 날 미사에 참여하던 중 사제가 하는 설교 내용을 알아듣지 못하는 귀머거리 신자들을 발견하게 되었는데, 그것이 그에게 사제가 되겠다는 결심을 하게 된 계기가 되었습니다.

치릴로는 프레토리아 시의 성 요한 신학교에 들어가기 위해 남아프리카로 돌아오게 되었는데 충격을 받은 어머니와 가족들은 그와 모든 관계를 단절합니다. 그러나 사랑은 더욱 강한 것이기에 얼마 뒤 관계를 회복합니다. 그가 입학한 신학교의 학장 신부님은 그에게 유대교적인 뿌리를 완전히 잘라버리지 않도록 충고합니다. 덕분에 젊은 치릴로는 매주 금요일 어머니를 모시고 유대교 회당의 안식일 모임에 참석하곤 했는데 1970년 그의 사제 서품식 날에는 어머니가 그를 제대까지 안내하게 됩니다.

당시 치릴로는 가톨릭교회에서 소리를 듣지 못하는 상태에서 사제로 서품된 세 번째 사람이었습니다. 몇 달 뒤 로마로 간 그는 바오로 6세 교황님을 알현했는데 이것은 그에게 매우 중요한 계기가 되었습니다. 바오로 6세 교황님은 이렇게 말합니다.

“주교님께서 내게 신부님에 대해 말해주었습니다. 신부님은 제가 만난 첫 번째 귀머거리 사제입니다.”

그리고 교황님은 뜨겁게 그를 끌어안으며 그의 어머니에게 하나의 메시지를 전해달라고 말합니다. 자신의 유일한 아들을 하느님께 바친 어머니를 훌륭한 유대인으로 존경하며, 교회에 그런 선물을 준 데 대해 감사한다는 메시지였습니다. 그리고 강복을 하면서 교황님은 그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가서 듣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하느님의 사랑을 전하세요.”

교황님의 태도와 말씀은 그에게 눈물을 흘리게 할 정도로 감동시킵니다.

남아프리카로 돌라온 그는 여러 해 동안 그 나라의 여러 곳에서 듣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해 일했습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소리를 듣지 못하는 젊은 사제 치릴로는 수도생활에 대한 부르심을 느끼고 ‘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에 들어가기로 선택합니다. 1978년 그는 듣지 못하는 청소년들을 위해 일하기 위해 소웨토로 옮겨가게 되었는데 그 지역은 아파르트헤이드에 대항하는 투쟁 거점 중 하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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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각장애 소녀와 어머니

어느 날 간호사 한 사람이 그에게 한 병원으로 가달라고 간절히 요청했는데 그곳에서 그는 수많은 귀머거리 어린이들이 맨 바닥에 앉은 채 하루 종일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지내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어린이들을 위해 유일하게 하는 일은 하루에 한 번 30분 동안 말하기 치료뿐이었습니다. 그처럼 버림받은 상황에 처해 있는 그들을 보면서 치릴로 신부님은 그들을 위해 무언가를 하기로 결심합니다. 학교 교실을 하나 요청한 다음 그들을 가르치기 시작한 것이었습니다.

1980년에는 듣지 못하는 흑인 청소년들과 어린이들을 위한 학교를 세웠는데 치릴로 신부님에게 이것은 듣지 못하는 흑인들에 대한 인종 차별의 결과에 대항해 투쟁하는 방법이었습니다. 그분 자신은 이렇게 말하곤 했습니다. “인종차별 정책은 모든 학생이 흑인인 이 학교의 어린이들이 남아프리카의 백인이나 인도인 등 다른 인종의 듣지 못하는 사람들과 어떤 접촉도 막아버리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그런데 제게 가장 충격적인 것은 듣지 못하는 이 어린이들이 아주 멀리 살고 있는 부모들로부터도 격리되어 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인종차별 정책은 실질적으로 어린이들과 부모 사이의 소통에도 장벽을 만들고 있었던 것입니다.” 치릴로 신부님은 계속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청소년들은 소웨토의 여러 부족에 속해 있었는데 이것은 큰 어려움을 낳았습니다. 어떤 언어를 선택해야할지 어렵게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각 부족마다 각기 다른 언어를 사용했기 때문입니다. 흑인 장애아를 위한 특별교육국에서는 줄루 족 언어를 사용하기를 바랐지만 이것은 많은 부모들의 항의를 불러일으켰습니다. 그래서 저는 정부에 부족을 초월해 하나의 공통된 언어를 쓸 수 있도록 영어를 가르칠 수 있게 해달라고 요청했습니다. 저는 계속해서 이런 요청을 되풀이했는데 결국 승인을 받게 됐습니다. 그렇게 해서 우리 학교는 남아프리카 전체에서 흑인들에게 영어를 가르치는 첫 학교가 되었습니다. 이것은 아파르트헤이드의규칙 아래에 놓여있는 이 나라에 하나의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한편 치릴로 신부님은 사람들이 말할 때 입술의 움직임을 읽는 것을 통해 일반적인 신자들 사이에서 사제 직무를 해나가는 것을 배워 나갔는데, 그 일은 쉽지 않았습니다. 신부님 자신이 이런 경험을 들려줍니다.

“한번은 고백소에 있는데 본당 신자 한 사람이 들어왔습니다. 그런데 고백소의 창살문을 열었을 때 그 사람이 아주 키가 큰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가슴과 넥타이만 보였습니다. 그 사람의 입술의 움직임을 볼 수 있도록 저는 의자를 밀쳐버리고 고백소의 맨 바닥에 앉아 그의 입술을 쳐다봐야 했습니다. 그런 상황에 아주 난처해진 그 사람은 보름 뒤 저에게 줄 선물을 준비해 가지고 다시 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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