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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호 0088
발행날자 2010-0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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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계 의 장

 

 

12[1].jpg

 

세계의 지붕 위에 위치한 본당

루이지 몰리나리 (Mondo e Missione) / 사진 net

티베트의 얀징에 유일한 현지인 사제가 인도하는 티베트 유일의 가톨릭 성당이 있다는 기사를 읽고 난 후 이곳을 여행하겠다는 꿈을 꾸기 시작했는데, 4년 전 일입니다. 그곳은 티베트에서 활동한 최후의 가톨릭 선교사 마우리치오 토르네이 신부님이 묻힌 곳입니다. 얀징 선교지는 2007년에 이미 방문한 적이 있는 윤난을 통해서 도달할 수 있는 해발 3,000m의 고지대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티베트의 젊은 가톨릭 사제에게 내가 찾아가고자 한다는 것을 알려준 쿤밍의 젊은 주교님에게 편지를 쓴 다음, 나는 나의 여행을 도와주고 나와 함께 가주기 위해 몇 해째 중국에서 살고 있는 나의 아들에게 연락을 취했습니다.

 

2008년 10월 초, 내 아들 카를로가 살고 있는 상하이에 도착한 나는 중국 서부를 향해 출발했습니다. 여행을 시작하기 전 나는 티베트 복음전파에 관한 여러 가지 자료들을 조사했습니다.

티베트 선교는 17세기 예수회 사제인 안토니오 안드라데 신부에 의해 시작됐습니다. 1세기 뒤에는 카푸친 회가 도착했고, 그 후에 약 100년 이상 그 곳에서 활동한 파리외방전교회까지 그곳에서 활동했습니다.

우리는 티베트어 통역과 함께 빌린 차로 얀징에 도착했습니다. 약 400㎞ 정도 되는 리징에서부터 얀징까지의 여행은 산사태와 무너져 내리는 자갈, 공사 등으로 매우 흥분되는 여행이었습니다. 우리는 해발 3,335m와 3,417m, 그리고 4,430m에서 휴식을 취했습니다. 이 세 군데가 우리가 지난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고개였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환한 미소13[1].jpg

로렌조 루 렌디 본당신부가 우리를 기다리는 곳은 해발 2,650m의 얀징이었습니다. 그분은 두 팔을 최대한 활짝 벌리고 가장 환한 미소로 우리를 맞아주었는데, 건장한 체격에 태양에 그을린 전형적인 티베트 인의 얼굴을 하고 있었습니다. 1856년 프랑스인 선교사들이 처음으로 교회를 건설한 샹얀에서 39년 전 태어난 그분은 자신의 가족이 4대째 가톨릭 신자라는 사실을 자랑으로 여기는 분이었습니다. 중국의 문화혁명 때 할아버지가 비밀스럽게 간직한 제의(祭衣)한 벌이 그분의 사제성소(司祭聖召)가 태어나게 하는 역할을 했다고 합니다. 사제가 없는 상황에서 작은 가톨릭 공동체를 지탱해가고 있던 한 연로한 수녀님의 격려에 힘입어 상하이와 베이징의 신학교에서 신학 공부를 하게 되었고, 1996년 사제 서품을 받았습니다.

저에게 이 여행을 하도록 밀어준 것은 관광에 관한 매력이라기보다는 신앙 때문이었는데, 신부님은 중국어를 할 수 있었기 때문에 아들의 통역으로 이 티베트 사제와 오래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는 것이 저에게는 큰 기쁨이었습니다. 멀리 격리된 곳에서 혼자 사목을 해야 하는 이 사제의 삶이 매우 어렵다는 것은 쉽사리 알 수 있었습니다. 그분은 자신의 본당뿐만 아니라 티베트 전체의 3 천여 가톨릭 신자들을 돌보고 있는데 이들은 열군데 정도의 지역에 흩어져 교회도 없이 가정집에서 모임을 하고 있습니다.

 

전 티베트의 유일한 예외 지역

15[1].jpg 이 지역의 주된 수입원은 강가에서 소금을 캐어 운반하는 일이었는데, 실제로 얀징이라는 도시 이름은 ‘소금 마을’이라는 뜻입니다. 이 지역에서는 포도 재배도 이루어지고 있는데 19세기 중반 쯤 프랑스 선교사들이 재배법을 알려 줬다고 합니다. 미사에 사용되는 포도주를 생산하기 위해서였는데, 지금 포도주는 손님을 맞이하는 데에도 쓰입니다.

내가 관심을 가진 부분은 불교 지역 한가운데에 있는 가톨릭 공동체의 상황이었습니다. 지리적인 위치나 고통으로 점철된 티베트 역사와 이 지역의 선교 역사를 감안하면 여러 가지 점에서 아주 특별한 공동체가 아닐 수 없습니다. 약 1천 명 정도 되는 얀징 주민의 3분의 1은 불교신자인데 이들의 집은 전형적인 불교 깃발로 알아볼 수 있습니다.

가톨릭 신자는 주민의 다수라고 할 수 있는 약 520명인데 나머지는 아무 종교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이런 이유로 얀징은 티베트의 예외 지역이 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앞에서 얘기한 대로 난징의 가톨릭교회는 프랑스 파리외방전교회의 결실인데 이 선교사들 중 몇몇은 티베트의 초대 그리스도인들과 함께 작은 공동묘지에 묻혀 있습니다.

얀징의 선교 역사를 돌이켜 보면 매우 극적인 시기들이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티베트의 초대 그리스도인들 중에는 수많은 순교자들이 나왔고, 1949년 공산 혁명이 있었습니다. 마오쩌뚱(毛澤東) 사망 후에는 얀징의 상황이 바뀌어 지금은 평온한 상태에서 살고 있습니다.

나이가 많은 신자들과 이야기를 하면서 나는 이곳의 가톨릭교회가 어떻게 살아남았고, 어떻게 자리를 잡았는지 보여주는 영웅적인 증거들을 수집할 수 있었습니다. 문화혁명 중 불교신자들과 함께 살면서도 계속해서 기도드리기를 고집한 가정들도 있고, 경우에 따라서는 성경과 성물들을 숨기고 보존하도록 도움을 준 이들도 있었습니다.

1986년 중국 정부가 교회를 다시 열도록 허가해 주었는데, 1988년 성탄 전야에 새 교회가 실현되는 감격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그 전까지 이작은 가톨릭 공동체는 1년에 한 번 티베트어를 할 줄 아는 윤난의 중국인 사제 한 분이 방문했는데 마침내 1997년 로렌조 루 신부님이 이곳에 정착하게 됐습니다. 그러나 새로 지어진 가톨릭 성당은 2년 뒤 지진으로 심각한 피해를 입었습니다. 지금 우리가 볼 수 있는 성당 건물은 다른 나라 신자들의 도움으로 건설되었는데 전형적인 티베트 양식으로 지었습니다. 2003년에는 성당 건물 옆에 세 개의 종이 달린 견고한 종탑이 세워졌는데 이 종들은 프랑스에서 기증받은 일본의 한 공동체가 자신들이 사용할 수 없게 되자 이곳에 기증한 것입니다.

이곳에서 묵은 기간이 오래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곳에 있는 우리 신앙의 형제들이 지닌 열정에 큰 감명을 받았다고 고백할 수 있습니다. 정말로 잊을 수 없는 경험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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