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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 교 간 의 대 화
종교간 대화를 위한 영성 4-4
강 디에고 신부 IMC

종교간 대화를 위한 우리의 노력에 관해 빛을 주고 무언가를 가르쳐줄 수 있는 성서의 구절들에 대한 연구를 계속합시다. 이번에 저는 바티스타 리디아 마지 여성 목사님이 유럽의 한 교회 일치 총회에서 제시한 묵상 내용을 정리하고자 합니다. 여기서 주제로 삼은 구절은 마르코 복음서 7장 24절부터 30절의 말씀이며 본문은 예수님께서 시리아-페니키아 여인과 나누신 대화에 대해 언급합니다.

‘충돌’의 이야기

예수님께서는 처음으로 갈릴래아를 떠나 티로와 시돈이라는 외지에 도착하셨습니다. 이 알려지지 않은 곳에서 그분은 겨우 휴식을 조금 취하실 수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한 여인이 와서 그분을 방해합니다! 그 여인은 예수님을 필요로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번에는 그분의 동정심이 움직이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이 끼어들어 예수님의 프라이버시와 공간을 침해하기 때문에 충돌이 일어납니다. 서로 다른 두 사람, 그들은 요구와 기대가 달랐고 이것이 충돌합니다. 여인은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려 더러운 악령으로부터 자신의 딸을 구해달라고 청합니다. 그러나 첫 번째 문제가 발생합니다. 이 여인은 시리아-페니키아 여인입니다. 그저 한 가지 ‘평범한’ 치유의 이야기가 될 수도 있었을 것이지만 이 경우에는 무언가 좀 더 첨가된 요소가 있습니다. 이 여인의 이름을 우리는 모르지만 의심할 여지도 없이, 이 여인은 히브리인이 아니었고 성스러운 백성에 속한 사람이 아닌 이방인 여인이었습니다. 여인은 간청의 말을 하지만 어떤 언어로 말했을까요? 어떤 지역의 언어였을까요? 예수님의 지역의 언어였을까요? 대화를 나누는 두 사람 사이의 차이는 점점 더 커지는 것 같습니다. 예수님은 남자이고 여인은 여성이었습니다. 예수님은 히브리인이고 그 여인은 그리스인이었습니다. 그 여인은 부유한 페니키아 지역 출신이고, 예수님은 초라하고 낯선 설교가였습니다. 그냥 평범한 치유의 이야기만은 결코 아닙니다. 예수님과 여인 사이의 대화에 ‘이방의 다른 요소’가 새로운 문제들을 불러 일으킵니다.

상대편의 생활 안으로 들어가는 것

17.jpg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거절하십니다. 어떤 면에서 언어의 만남은 있는 것 같지만 생각의 범주에서는 만남이 없습니다. 여인은 자신의 딸이 아프기 때문에 도움을 청하고 있는데 예수님께서는 그녀에게 은유로 답하십니다. “먼저 자녀들을 배불리 먹여야 한다. 자녀들의 빵을 집어 강아지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옳지 않다.” 부적절하고 모욕적인 것 같은 태도가 여인의 소망을 짓밟습니다. 여인은 도움이 절실히 필요해서 예수님과 관계를 맺고자 하지만, 그분은 만남을 거부하시고 벽을 쌓으십니다. 냉정하고, 엄격하게“싫다”고 하십니다.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예수님께서 왜 싫다고 하실까요? 그리고 왜 이런 방법으로 싫다고 하실까요? 복음사가 마르코는 여기서 우리에게 예수님의 인성이 매우 깊어서 선입견을 가질 수 있는 분으로 소개하는 그리스도학을 우리에게 제시하려는 듯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이방인 여인을 부유한, 아마도 속물근성을 너무 많이 지닌 사람으로 여기시는 듯합니다. 도움을 청하는 사람에게 우월감과 거드름을 피우시는 것 같습니다. 히브리인들이 때때로 이방인들에게 사용하던 모욕적인 표현을 그녀에게 반복해서 사용하십니다. ‘개’라든지 ‘불결한’… 이라든지….

여인은 마음을 상하고 반기를 들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녀의 만남에 대한 원의와 필요는 선입견보다 더 강합니다. 여인은 예수님을 이해하려 노력하며 예수님의 은유를 경청하고 신중히 받아들이려 합니다. 예수님께서 어떻게 자기를 이해하시는지, 자기를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그리고 그들의 백성들을 어떻게 바라보시는지를 이해하려 노력합니다. 아마도 전부 다 이해하지는 못하지만 그러나 노력은 하면서 “주님, 그러나 상아래에 있는 강아지들도 자식들이 떨어뜨린 부스러기는 먹습니다.” 하고응답합니다. 그녀는 예수님의 사고방식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을 이방인 백성의 한부분으로 정의하는 것을 받아들입니다. 즉, 자기 백성을 개라고 부르는 것을, 그리고 자신을 무가치한 존재로 여기는 것을 수용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움직입니다. 끝내 충돌은 만남으로 변화됩니다. “당신은 이스라엘의 자녀들을 배불리기 위해 오셨습니다. 그러나 당신의 백성은 세상 한가운데에 있습니다. 당신의 자녀들은 배불리 먹고 있는데 개들, 즉 우리 이방인들은 상 아래에서 부스러기라도 주워 먹을 수 없는 것이라면 그런 만찬은 진정 하늘나라의 만찬이 될 수 없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복음화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 이상한 ‘여선생’, 동방교회 전통이 신학자요 사도로 정의하는 그 이방인 여인과 이미 마음이 통합니다. “네가 그렇게 말하니 가보아라. 마귀가 이미 네 딸에게서 나갔다.”

마침내 대화가 이루어졌습니다. 이 교환으로부터 누가 더 많이 받았습니까? 양편이 모두 힘들게 서로를 이해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양편이 모두 선입견을 극복하고, 상대편 사고의 범주 안으로 들어가기 위해 경청을 배워야 했습니다. 누가 더 많이 받았겠습니까? 아마도 둘 다일 것입니다. 그녀는 그녀의 딸의 치유를 획득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은총이 자신의 미션에 대한 이해의 테두리를 넘어간다는 사실을 알게 되셨을 것입니다. 실지로 그 다음 즉시 예수님께서는 다시금 빵을 불어나게 하셨고, 그것을 그 이방인들에게 주셨습니다. 이제 그분은 그들을 굶주린 ‘자녀들’로 바라보신 것입니다. 그리고 또한 가장 큰 장벽은 지리적인 것도 아니고 종교적인 것도 아니며, 오히려 마음의 장벽이라는 것도 깨달으셨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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