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05~06호

07-아주 특별한 선교사-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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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 교 체 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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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특별한 선교사-하
조르조 바르나델리 (Mondo e Missione)
우리는 모든 사람이 인간의 오감을 모두 다 쓰고 있지 못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이런 사람들을 복음화하는 문제는 많이 이야기하지 않는다. 그래서 남아프리카 출신 한 사제의 특별한 이야기를 소개하고자 한다. 그는 귀머거리로 태어나 몇 해 전부터는 시력마저 잃었지만 귀머거리와 맹인의 언어로 복음을 선포하는 일을 계속하고 있다. 그의 이야기를 잘 소개하는 것은 가치가 있는 일인 만큼 두 번에 걸쳐 소개하고자 한다. (편집자)

아프리카에서 아시아로

1985년 치릴로 악셀로드 신부님은 싱가포르로 여행했고, 거기서 석 달 간 머물면서 청각장애인들을 위한 활동도 계속하셨습니다. 그러나 같은 기간에 그분은 처음으로 시각의 심각한 문제를 발견하기 시작했습니다. 1988년 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의 총장 신부님께서는 남아프리카를 방문하시던 중 치릴로 신부님께 말씀하셨습니다. “사람들이 나에게 신부님께서 싱가포르에 머무시는 동안 놀라운 일을 하신 데 대해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신부님께서 중국으로 가시는 것은 어떻겠습니까?”치릴로 신부님은 말씀하십니다. “저는 매우 당황했고 무어라 답을 드려야 할지 몰랐습니다. 29 copy.jpg 저는 단지 점점 더 나빠지는 시력과 남아프리카에 두고 떠나야 할 청각장애인들에 대한 생각에만 빠져 있었습니다. 그러나 동료 수사님들과 청각장애인 공동체는 주님께서 저를 부르신다는 것을 알았고, 저에게 큰 용기를 주었습니다. 총장 신부님께서는 저에게 시력은 제 문제가 아니고 하느님의 문제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이렇게 해서 저는 새로운 사명을 받아들였고, 새로운 도전을 시작하면서 큰 기쁨도 느꼈습니다. 저는 여러 가지 일을 해야 했지만 우선 새로운 언어를 배워야 했습니다. 왜냐하면 청각장애인도 다른 대륙으로 갈 때 새로운 언어를 배워야 하기 때문입니다. 한문을 좀 배우기 시작했을 때 청각장애인들은 저를 신뢰하기 시작했고, 그들이 무식한 시민으로 취급되고 있으며 그들만을 위한 센터를 가질 꿈을 꾸고 있다는 말을 저에게 했습니다. 저는 어린 청각장애인들의 부모님들도 만났고, 즉시중국에서는 장애인들이 그들의 처지를 부끄러워하며 그들의 가족들에게는 난처한 존재가 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부모님들은 흔히 이런 자녀들을 집안에 가두어두고 사회로부터 격리시키며 때로는 이런 자녀들이 있다는 것 자체를 국가기관에 알리지 않고 있습니다. 저는 할 일이 참 많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치릴로 신부님께서 마카오에 도착했을 때, 그 곳에는 청각장애인들을 위한 시설이 전혀 없었습니다. 신부님께서는 하나의 센터를 설립하셨고, 얼마 안가서 이를 그 지역 청각장애인들에게 맡기셨습니다. 이는 포르투갈의 마카오에 대한 오랜 식민체제로부터 가까이 다가온 중국정부에로의 반환을 내다보고 행한 조처이기도 했는데, 실제로 1999년 마카오는 중화민국 정부에 반환되면서 식민체제를 벗어났습니다. 한문을 배우는 것 이외에 신부님은 시청직원들과 의사를 소통하기 위해 포르투갈 어를 배워야 했습니다. 시청에서는 1999년 이전에는 영어와 중국어를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신부님의 첫 번째 임무는 여러 종류의 장애인 센터에서 청각장애인들의 장애의 경중을 가려내는 것이었습니다. 신부님께서는 이 장애인들이 장애의 정도가 다르기 때문에 한 장소에 모두 함께 머물게 할 수는 없다고 정부 측에 거듭 제안했습니다. 정부 측에서는 이들이 모두 한 곳에 머물러야 한다고 말했지만 신부님은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차츰 신부님은 정부 측과 장애인들의 신임을 얻게 되었고, 하루에 18시간씩이나 일을 하면서 마침내 1994년에는 청각장애 어린이 교육센터를 세웠습니다. 1998년에는 또한 청각장애인들을 위한 체육협회도 결성했고, 마카오의 사회사업 본부도 창설했습니다. 마카오에 12년간 거주하면서 신부님은 또한 중국 본토 뿐 아니라 홍콩, 필리핀의 여러 프로젝트들도 주관하셨습니다.

새로운 도전

2000년은 새로운 여행의 해였습니다. 이는 아마도 가장 어려운 여행이었을 것입니다. 이때 그는 청각과 시각 장애인들을 위해 영국 런던에 체류했습니다. 그분은 말씀하십니다. “제 마음은 아직도 중국 백성들 사이에, 그들의 문화와 특히 마카오의 청각 장애인들의 공동체와 함께 있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저를 다른 곳으로, 낯선 나라로 데려가신 것입니다. 제게는 그 곳의 모든 것이 새로웠습니다. 단지 몇몇 사람들만이 제 생애에 대해, 제가 했던 활동들에 대해 알고 있었습니다. 갑자기 저는 다시 그저 청각-시각 장애인으로 남았습니다. 저는 퍽 외로웠으며, 하느님께서 저를 위해 어떤 생각을 가지고 계신지 알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 저와 함께 계셨기 때문에 두려움 없이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신부님은 한 발자국씩, 60세의 나이에, 자신의 독창성을 계발하기 위해 브라유 방법과 그 외의 다른 기술들을 활용하면서 중국에서 처음으로 한문을 공부하던 시절처럼 열심히 처음부터 다시 시작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캠던 타운(런던의 동북부)에 있는 마리아 홀 본당에서 그분은 웨스트민스터 대교구의 청각-시각 장애인들을 위한 행정책임자가 되었습니다. 미사를 봉헌할 때면 그분은 어린이들을 주위에 부르시곤 합니다. 강론 때에는 예수님의 “와서 나를 따르라”라는 말씀을 상기시키면서, 복음에는 예수님께서 사람들을 손으로 만져주시는 장면이 몇 차례나 나오는지를 설명하십니다. 그리고는 사람들에게 그 자리에 있는 맹인들에게로 가서 예수님처럼 그들을 만져주도록 초대합니다. 그분은 말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청각-시각 장애인들의 처지를 무언가 표현할 수 없고, 생각할 수 없고, 상상할 수 없는 것으로 여깁니다. 제게는 이 같은 처지가 살아가는 새로운 방법이 되었습니다. 이 방법은 저에게 새로운 방향을 제시해 줍니다. 물론 좌절을 극복해야 할 때도 있기는 하지만, 저는 또한 많은 새로운 기쁨을 체험하기도 하며, 많은 새로운 도전의 기회를 가지기도 합니다. 청각-시각 장애인이라는 저의 상황은 제 생애의 가장 중요한 교훈이 되었습니다.”

감동적이고 모범적인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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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애인의 세계에 대한 유명한 영화의 줄거리가 된‘깨어난’이란 책의 저자, 올리버 색스는 말합니다. “칠릴로 악셀로드 신부님은 세상에 유일하고 지대한 기여를 하셨습니다. 그분은 자신의 청각-시각 장애에도 불구하고, 아니 바로 그 장애를 통해서 이 같은 공헌을 하신 것입니다. 그분의 일생은 감동적이며 모범적입니다. 그분은 타인에 대해, 특히 차별대우를 받는 사람에 대해 동정과 배려의 삶을 살아가고 계시는 분이십니다.”우리는 그분의 일생이야말로 들을 수 없는 사람들에게 살아있는 그리스도의 말씀을 전하기 위해 평생을 바친 위대한 선교사의 일생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칠릴로 악셀로드 신부님의 꿈은 무엇일까요? 장애가 봉헌생활, 혹은 사제생활의 성소에 걸림돌이 되지 않게 하는 것입니다. 사제의 해인 올해(2010)에 그분은 교구의 신학교와 수도회들이 청각 장애인들의 양성에 적합한 도구와 제도들을 활용하면서 청각장애인들의 입회를 환영하고 증진할 수 있도록 촉구했습니다. 이 소망은 청각 장애를 지닌 모든 신자들에게로 확산되고 있습니다. 그분들도 다른 모든 신자들처럼 교회 안에서 그들의 신앙을 생활할 수 있음을 느껴야 할 것입니다. 그분에게는 그분의 이중 장애가 청각-시각 장애를 가진 이들과의 의사소통을 위한 특권적 도구가 됨을 대변하고 있습니다. 런던에서 그분은 계속 이 나라와 여러 문화에 속한 청각 장애인들을 만나고 있습니다. 그분이 2005년에 브라유로 기록한 자서전은 청각장애인들과 일반인들로 구성된 자원봉사자들의 협력으로 중국 브라유로 번역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