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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 교 체 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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캄보디아의 동부의 주(州)인 콤퐁참으로부터 약 40㎞ 북쪽에 위치한 메콩강변의 작은 마을 케볼레우의 새로운 성당에서 22명의 젊은이들이 세례를 받은 사실은 가톨릭교회에 희망의 표징이다. 이러한 희망은 루카 볼렐리 신부님을 포함한 수많은 선교사들과 이 지역 평신도들의 깊은 신앙의 결실이다.(편집자)

금년(2010년) 4월 4일 부활대축일. 싼과 체이헤잉은 다른 스무 명의 젊은이들과 함께 세례를 받았습니다. 싼은 이제 요셉으로 불리는데, 그가 이 이름을 선택한 것은 동정녀 마리아의 남편처럼 의로운 사람이자 충실한 아빠요 남편이 되기를 바랐기 때문입니다. 무엇 때문에 그리스도인이 되고 싶었는지 묻는 질문에 그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그리스도교 신자들 사이에서 느꼈던 따뜻한 분위기와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도움과 교육활동을 보면서 교회는 복음이 가르치는 대로 모든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체이헤잉 또한 그리스도교 신자들의 성실한 삶의 모범을 보면서 매력을 느꼈습니다. 체이헤잉은 교리공부를 하는 동안에도 여러 해 동안 아버지와 함께 절에 다녔지만 결국 그리스도교 신자가 되기로 결심했고, ‘크리스티나’라는 이름을 선택했습니다. 어느 날 ‘시에나의 성녀 카타리나’에 관한 이야기를 들은 그녀는 평화를 재건하기 위해 권력자들을 불편하게 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은 이 문맹의 여인에게서 매력을 느꼈습니다. 싼과 체이헤잉, 그리고 케돌레우의 다른 젊은이들의 세례는 이곳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역사에 중요한 전환점이 되고 있는데, 십자가와 부활의 역사인 이 공동체의 역사에 대해 여러분과 나누고자 합니다. 약 100년 전 이 젊은이들의 조상들이 그리스도교 신자가 되었을 때 케돌레우라는 도시는 생긴 지 얼마 되지 않았고, 사람들은 아직 피부에 노예의 표식을 지닌 채 살고 있었습니다.

노예들에 의해 태어난 교회

모든 것은 1883년 시작됐습니다. 프랑스의 젊은 선교사 장 라자르 신부님은 수도 프놈펜 근처인 모아트크라사르에 성당을 짓기 위한 목재를 찾기 위해 메콩강을 거슬러 올라갑니다. 그런데 크로츠마르 지역에 도착한 신부님은 이곳에서 그리스도교 박해를 피해 피신한 한 그룹의 베트남 출신 가톨릭 신자들을 만납니다.

그들의 비참한처지에 깊은 인상을 받은 신부님은 장상들에게 그곳으로 돌아가 그들을 위해 일할 수 있게 해 달라고 요청합니다. 결국 라자르 신부님은 15년 동안 이곳의 베트남 공동체를 위해 헌신했는데 1897년 12월 28일 프랑스 보호령 당국으로부터 아주 특별한 임무를 부여받게 됩니다. 캄보디아의 노예제도를 폐지하는 왕의 칙령을 실행에 옮기는 책임을 맡게 된 것입니다. 소식이 알려지자 사흘 동안 150명도 더 되는 사람들이 완전히 발가벗은 상태로 신부님을 찾았습니다. 주인들이 그들에게서 옷까지 모두 빼앗았기 때문에 벗은 채로였습니다. 라자르 신부님은 그가 돌보던 베트남 공동체 근처의 땅에 이들을 정착시키기로 결정합니다. 라오스와의 국경지대의 산악 부족이자 여러 세대 동안 노예로 지낸 이들은 과거의 주인들이 제공하던 보호막도 없어진 이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막막한 상태였고, 결국 그곳에 머물러 새로운 삶을 시작하기로 결심합니다. 이것이 케돌레우라는 마을이 태어나게 된 계기였는데 라자르 신부님과 여러 달 접촉을 하며 지내던 이들 중 몇몇 가정들이 처음으로 그리스도교 신앙에 관심을 보입니다. 병세가 악화되고 쇠약해진 라자르 신부님은 전에 자신이 돌보던 모아 트크라사르 공동체의 교리교사들의 도움을 청했는데, 1900년 8월 15일 첫 스무 사람이 세례를 받게 됩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이 공동체는 점점 자라나 1923년에는 신자들의 수가 213명에 이릅니다.그러나 위기의 순간도 있었는데, (1913년에 선종한) 라자르 신부님의 후계자인 다비드 신부님 역시 병에 걸려 1930년에 프랑스로 돌아갈 수밖에 없게 된 것입니다. 목자가 없는 공동체는 몇 십 년 사이에 몇 십 명으로 줄어들게 됐습니다. 이 공동체는 결국 북쪽의 몇 몇 공동체를 돌보던 미셀그루 신부님이 케볼의 공동체까지 돌볼 것을 받아들일 때까지 기다려야했는데, 신부님은 매번 메콩강변을 따라 200㎞ 이상을 자전거로 이동해야 했습니다. 새로 태어난 이 공동체와 그 전부터 존재하던 베트남 공동체와의 관계는 두 나라 사이의 정치적인 적대 관계에도 불구하고 매우 좋았습니다. 성당을 공동으로 사용했고, 주일 미사도 두 공동체가 각각 자신의 언어로 기도를 드린 다음 라틴어로 드리는 미사에 공동으로 참여했습니다.

1969년에는 아직껏 많은 사람들이 ‘로폭퐁모안’(달걀 신부님)이라는 재미있는 별명으로 기억하는 라판 신부님이 도착하게 되는데 신부님의 별명은 양계를 도입해 마을의 삶을 개선 시키기 위해 수많은 노력을 했기 때문에 얻게 된 것이었습니다.

지하 교회와 고립의 시기

라판 신부님이 이곳에 도착한 시기는 캄보디아 현대 역사에서 가장 어두웠던 10년과 겹칩니다. 1970년 3월 18일 론놀 장군이 군사 혁명을 일으켜 권력을 차지하면서 피비린내 나는 폭력의 시기가 시작됐기 때문입니다. 이웃한 베트남에서 벌어지는 전쟁은 캄보디아까지 확대됐고 케돌레우에서는 성당과 사제관, 수녀원 등이 파괴됩니다. 이 지역은 몇 달 째, 론놀 장군의 정부에 적대적이면서 베트남 군대와 동맹을 맺고 있는 크메르 루주의 지배하에 놓이게 됩니다. 그 결과 캄보디아에 있던 베트남 사람들이 대규모로 베트남으로 탈출하는 사건이 벌어집니다. 1972년(폭탄으로 인해) 라판 신부님이 사망한 다음 이곳의 작은 그리스도교 공동체는 기나긴 지하생활과 다른 지역의 교회로부터 완전히 고립된 시기를 살게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난한 농부였던 그들은 ‘저층민중’으로 인식되어 크메르 루주의 탄압이 다른 지역만큼 격렬하지는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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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희망의 태동

1986년에 이르러 불교에 대해 신앙의 자유가 허용됐는데, 그리스도교 신자들은 아직 두려움 속에서 살고 있었습니다. 1990년 부활대축일. 마침내 가톨릭 신앙에 대해서도 자유가 인정됩니다. 그러나 케돌레우의 작은 공동체와 의 새로운 접촉은 1992년까지 기다려야 했습니다. 신자들이 한 명의 교리교사와 두 사람의 프랑스인 선교사의 도움으로 다시 모이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 후 캄보디아인 파울리 신부님이 마을에 상주하기 시작했고, 교회는 천천히 다시 태어나고 있습니다. 대나무로 지은 작은 경당은 몇 해 뒤, 좀 더 크게 목재로 지어졌습니다. 2009년에 이르러 이곳 공동체는 벽돌로 된 성당을 짓기로 결정하고, 지난 4월 13일에 완공을 보아 축성식을 통해 하느님께 봉헌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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