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도회 소식

감사와 기쁨의 여정

by 정진 posted Oct 19,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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꼰솔라따 가족 여러분, 저는 케냐 출신 클레멘트 신부입니다. 지난 2011년 한국에 도착하여 지금까지 보낸 선교사 생활을 여러분과 나누고자 합니다. 다소 천천히 성장하고 있지만, 믿음, 소망, 인내의 기둥이 서로 이어지는 내 삶의 이야기입니다.

 

꼰솔라따 선교 수도회 영성에 대한 기초 양성 과정에서, 나는 다른 가치들 중에 만민을 향한 선교를 준비하며 깨닫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솔직히 아시아에서 선교사가 되는 것에 대해서는 많이 생각하지 않고 있었습니다. 아시아에 대한 정보는 다른 대륙에서의 선교 경험에 관한 충분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선교 경험에 대한 공유도 충분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화와 식별 후에 2010년 한국 파견이 결정되었습니다. 2011 1 8일 사제 서품을 받은 후, 그 해 6 11일 한국에 도착했습니다. 나는 동료들로부터 매우 따뜻한 환대를 받았지만, 이것이 내가 경험한 문화적 충격을 완화시키지는 못했습니다.

내 주위 사람들은 매우 다정했으며, 내가 새로운 환경에 잘 적응하고 있는지 자주 묻고 확인했습니다. 그러나 의사소통이 되지 않는 것에 대한 극도의 어려움은 매우 컸습니다. 아프리카에서 태어난 나는 기본 양성을 남미에서 6년간 하였고, 이탈리아어를 공부하기 위해 이탈리아에서 단기간 머무른 뒤 한국에 왔던 것입니다. 내가 한국에 도착했을 당시 안부 인사로 “안녕하세요”를 겨우 알뿐이었습니다. 나 자신이 심각한 언어 장벽을 만났음을 깨달았습니다.

그 당시 내 첫 경험은 도무지 소통이 안되는 언어에, ‘정전’이 된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내 주위의 모든 사람들은 말하고 있었고 얼굴 표정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나는 모든 것이 새로운 언어라 전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 모든 것이 너무 불가능하고 실망스러워, 그 당시에는 내 감정조차도 표현할 수 없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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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목 중인 서강대 캠퍼스에서

이 상황은 새로운 문화에 적응하는 어려움으로 더욱 나빠졌습니다. 모든 상황은 너무나 달랐고 극단적이라 비록 내가 마음을 열었을지라도 적응하기에는 너무 많았습니다. 그러나 다른 무엇보다도 충분한 영양을 섭취할 수 없었습니다. 내가 먹을 수 있는 한국음식을 찾기가 매우 어려웠습니다. 이 모든 갑작스런 언어, 음식, 문화 충격은 나의 중심을 흔들었습니다. 어떤 시점에서 내 삶이 경직되고 길고 어두운 터널을 지나고 있음을 느꼈습니다. 그 당시에 나는, 나를 흔들 수 있는 모든 감정들에 준비가 아직 되지 않은, 서품 받은 지 얼마 안된 사제였습니다. 나는 이전에 선교사가 되기를 원했고 여전히 원하고 있으나, 바로 이 시점에서 아닌 것 같았고 상실감을 느꼈습니다. 불가능성의 감정은 선교사로 살기를 원하는 숭고한 삶을 변화시키려 하고 있었습니다. 이는 내 영혼이 크게 소진되는 듯한 느낌이었습니다.

 

모든 것이 회복될 수 없을 것처럼 보였으며, 이는 내 영혼의 궁극적 소진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은총으로 이러한 소진이 한국에서 내가 계속 남을 수 있도록 완전히 변화시키는 다리 역할을 했습니다. 1년 반의 인내 끝에 마침내 나는 겨울이 가고 봄이 왔음을 느꼈습니다.  더 잘 말한다면 내가 부활한 것처럼 느꼈습니다. 내 주위의 많은 다정한 사람들의 도움으로 문화적 충격을 흡수하기 시작했습니다. 나는 한국 음식과 그 다양성에 적응했습니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한국어 배우는 일에 점차 감각을 갖기 시작한 것이었습니다. 학교에서 한국어를 배운 이후에 나는 인천교구 김승욱 베드로 신부님의 배려로 그 당시 부평 2동 본당 경험을 하는 특권을 갖게 되었습니다. 여기에서 1년 신부로 일하는 동안 한국 사람들의 문화, 언어, 음식에 관해 많이 배웠습니다. 이는 현재의 내가 될 수 있도록 만들어 준 매우 중요한 경험이었습니다.

 

되돌아보았을 때, 내 삶에서 가장 도전적인 시간은 한국에서의 첫 2년이었습니다. 이제 나는 그 시기를 하느님의 은혜 및 개인적인 성장의 순간으로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나는 이제 한국 사람들과 음식에 완전히 적응하여 한국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나의 고향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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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부평2동 성당 청년들과 함께


이러한 효과, 이러한 전환은 선교 및 사목 직무에 몰입하는 과정에서 좀 더 의미 있고 깊이 있는 경험을 할 수 있게 만들었습니다. 우리 꼰솔라따 선교 수도회 사목 목표인 지역 교회와의 협력에 따라, 나는 인천 교구와 의정부 교구에서 스페인어와 영어를 사용하는 이주 노동자 사목에 간헐적으로 참여했습니다. 나는 또한 지역교회에서 조직하여 진행되고 있는 양성 프로그램에도 참여했습니다. 내가 직면했고 극복했던 많은 도전과제들 덕에 소외당하고 일반적으로 불우한 외국인들에게 제대로 봉사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그들과 희망이나 믿음뿐만 아니라 황폐함도 공유합니다.

 

우리 한국 꼰솔라따 선교 수도회 공동체는 새로운 사회적 패러다임 맥락에서 복음화의 쇄신에 부응하여 대학교 사목을 받아들였습니다. 그래서 나는 2016 3월 이후로 서강대학교에서 상근하며 일하고 있습니다. 특히 서강대뿐만 아니라 주변 대학들의 유학생에 대한 통합적인 사목 돌봄을 하고 있습니다. 원어민 교수, 직원 및 학생에 대한 사목 돌봄입니다. 그리고 또한 대학에서 스페인어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이는 내가 다양한 사람들과 다른 세 언어 한국어, 영어, 스페인어를 모두 한 맥락에서 동시에 더 가까이 일할 수 있는 계기가 된 학문적 상황이 되었습니다.

 

이제 나는 한국에 온지 7년이 넘었습니다. 되돌아보면 많은 감사와 기쁨의 여정이었습니다. 내가 살아가는 다양한 순간에 내 주위에 많은 훌륭한 사람들이 있어왔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내가 결코 충분히 감사를 표할 수 없을 만큼 이 모든 것을 통해 나를 이끄시는 하느님의 성령이 제일이십니다. 나의 이러한 경험은 낯선 땅에서 새로운 상황에 자신들을 몰입하고 있는 많은 선교사들의 경험과 비슷하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이는 세상의 다른 지역에서 복음을 전하는 특히 우리 한국 출신 선교사들을 생각나게 합니다. 선교 가족에 함께한다는 느낌은 하느님의 포도밭에서 하나 됨을 느끼는 것 그 자체로 참 좋습니다.

 

이 감사와 특권은 내가 한국에서 꼰솔라따 선교 수도회의 30년 축하를 기뻐하는 구성원의 하나임을 느끼게 합니다. 이는 다른 대륙에서와 마찬가지로 기쁨 및 성취뿐만 아니라 막연한 도전과 어려움으로 가득 찼던 하느님 은총의 30년입니다. 이 현존의 각 단계마다 여기 이곳에 있었던 우리 선교사들은 모든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그리고 불안, 노력, 희생이 있었더라도 이 사명은 하느님의 영광을 위한 바로 그 삶이 되었습니다. 이 상황은 확실히 50주년, 75주년, 100주년 기념 때마다 다를 것입니다. 나는 이 놀라운 역사의 한 부분이 된 것이 자랑스럽고 축복이라 생각합니다.


클레멘트 신부 IM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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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사목 중인 유학생의 혼배 미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