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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5월 13일

"냐아타": 온갖 지비의 어머니.

케냐 니에리에서 드리는 미사 중에 교황 대리자 주기경님으로 복녀 승인 선언


<꼰솔라따 잡지에서 난 특집에서>


영광의 신발

안나마리아 지라르디 MC


너무나 감격스럽고도 기쁘게 우리는 여러분에게 우리 꼰솔라따 선교수도회 가족 모두에게 돌아가는 은총의 사건 하나를 선포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주님께 우리 모두의 감사하는 마음을 전해드리고자 합니다. 창설자 알라마노 복자에게 헌정된 해에,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알라마노 복자의 자녀들 중 한 사람의 성덕을 인정하는 선물을 하고자 하신 것입니다. 바로 이레네 스테파니 수녀님이십니다! 2014년 6월 12일 프란치스코 교황께서는 꼰솔라따 선교사였던 이레네 스테파니 수녀님의 시복을 위한 교령 발표를 승인하셨습니다. 또한 2015년 5원 23일(토)에 수녀님의 시복식을 허락하셨습니다. 우리는 이번 특집을 통해 감사하는 마음으로 이를 기념하고, 짧게 이 성덕의 여정을 알려드리고자 합니다.(편집자)


이레네 스테파니 수녀

(1891년 8월 22일 - 1930년 10월 31일)


어린 시절

1891년 8월 22일 토요일, 12남매 중의 다섯 째 딸로 안토라는 브레샤의 작은 고장에서 메르체데 스테파니가 태어났습니다. 태어난 다음 날 바로 세례를 받은 이 작은 아기는 곧 기도하는 법도 배우고, 감실 안에 계신 예수님을 찾아뵈러 성당에 가거나, 열심인 가톨릭 신자이었던 부모님과 더불어 축일 미사에 참례하는 것도 배웠습니다. 그녀는 이미 13살이 되었을 때부터 부모님께 “나는 선교사가 될 거예요.”하며 떠나고 싶어 했지만, 너무 어렸기 때문에 아직 기다려야 했습니다. 1907년 어머니 아눈치아타는 44세의 젊은 나이에 기관지 폐렴에 걸려 며칠 만에 사망하였습니다. 어머니는 메르체데에게 남동생 우고와 여동생들에게 엄마 역할을 대신하여 기도하는 법을 가르치고 착한 아이들이 되도록 가르쳐 달라는 당부를 잊지 않고 돌아가셨습니다. 1년이 조금 지나 어린 우고도 하늘나라로 떠났습니다.

1909년 아버지는 테레사 사볼디와 재혼했는데, 그녀와의 사이에서 다른 자녀는 없었습니다. 아버지는 그 많은 가족들을 돌보고, 여관을 경영하면서 포도주 사업을 하는 것이 불가능했습니다. 연중 어떤 때는 자녀들을 실제로 홀로 남겨두어야 했습니다. 여름에는 낮뿐만 아니라 밤에도 멀리 떠나 있었는데, 가엾은 메르체데는 아직 어렸기 때문에 도저히 그 모든 수많은 허드렛일을 감당해 낼 수가 없었습니다. 새어머니도 사랑으로 아눈치아타의 다섯 자녀들을 마치 자신의 아이들처럼 길렀습니다.

메르체데에게 마침내 조용한 때가 와서 그녀는 매일 영성체와 성체조배 및 기도를 통해 더욱 확고하게 예수님을 따를 수 있었습니다. 기도의 사도직에 열성이었던 그녀는 어린이 교리 교육을 담당하여 아이들에게 “잔 꽃송이”를 모으도록 가르치고, 사람들을 모아 묵주기도를 바치곤 했습니다.

꼰솔라따의 선교사

1905년에 이미 메르체데는 안젤로 벨라니 신부가 아프리카로 떠나기 전 작별인사를 하러 안토에 왔던 것을 계기로 꼰솔라따 선교사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기다림은 길었습니다. 아버지는 메르체데가 떠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는데 그녀가 아직 어리다는 것과 그것이 진정한 성소인지 아니면 일시적인 들뜬 기분에 지나지 않는 것인지를 염려했기 때문입니다. 카피타니오 신부(안토의 본당신부)는 메르체데를 도와 1911년 5월 5일 복자 요셉 알라마노 신부에게 편지를 보냅니다.

마침내 아버지는 “마지못해서”라는 내용이 담긴 허용서를 적어 줍니다. 1911년 6월 19일 메르체데는 토리노로 가서 금방 적응합니다. 1912년 1월 28일 영성수련을 마친 후 메르체데는 그토록 기다리던 착복식을 합니다. 창설자는 그녀의 수녀복을 강복한 후, 그녀의 이름을 이레네 수녀로 바꿉니다. 그렇게 2년 동안의 수련기를 시작하여 1914년 1월 24일 마무리하고, 그녀는 알라마노 신부의 손을 잡고 서원을 합니다.

그녀의 삶의 계획, 그것은 이렇습니다. “오로지 예수님! 내게서 비롯되는 것은 아무것도 없으며 모든 것을 예수님과 더불어. 나의 것은 아무것도 없으며 모두가 예수님의 것. 나를 위한 것은 아무것도 없으며 모두가 예수님을 위한 것. (그리하면 너는 살 것이다!)” 예수님께 대한 전적인 헌신이었습니다.

아프리카의 선교사

1914년 12월 28일, 23세 반이었던 이레네 수녀는 케냐로 떠납니다. 그곳에는 이미 1902년부터 꼰솔라따의 첫 선교사들이 일하고 있었습니다. 그들 또한 알라마노 복자의 마음에서 태어난 이들입니다. 제노바에서부터 길고 힘겨운 여행 끝에 이레네 수녀는 1915년 1월 31일 마침내 몸바사에 도착합니다. “토쿰예 예수 크리스토!” (그리스도 예수님은 찬미 받으소서)는 이레네 수녀가 키쿠유어로 구사할 줄 아는 유일한 문구였지만, 그녀는 쉴새없이 항상 긴급 상황을 맞을 준비를 하여 짧은 시일 안에 언어를 배우고 의사소통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녀는 그들 모두에게 모든 것이 되어 주었는데, 그 목적은 단 한가지였습니다. 곧 “내게 천 개의 삶이 있다면 그 모든 삶을 예수님께 드려 그분을 사랑하고 그분을 사랑하게 하며, 영혼들을 그분께 회개시키겠습니다.”

세계 제1차대전 중에는 탄자니아 킬와 키빈예의 군병원에서 “운반인”라고 하는 원주민 짐꾼들을 돌보았습니다. 그들은 엄청난 짐을 짊어지고 짐승보다 나을 것 없는 취급을 받으며, 기근과 전염병 등에 시달리고 있었습니다. 이레네 수녀는 미소를 띠고 부드러우며 단순하게, 버림받은 이들 사이에서는 그리 당연한 것으로 여겨지지 않던 작지만 확고한 인간적 애덕이 드러나는 태도로 모두를 돌보았습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예수님에 대해 말하고, 교리를 가르치며, 세례를 주었습니다. 마침내 전쟁도 끝납니다.

1920년에는 가브리엘라 수녀와 더불어 이레네 수녀는 케냐의 게콘디에 도착하여 학교에 근무합니다. 이레네 수녀는 튼튼한 신발을 신고(그 장화와 같은 신발은 늘 이레네 수녀와 떼어놓을 수 없는 상징이 됩니다.) 걸어서 복음의 순례를 시작합니다. 손에는 묵주를 들고, 얼굴에는 미소를 띠고, 모두에게 하느님의 아드님께서 세상에 오시어 모든 인간의 영원한 구원을 위해 십자가에서 돌아가셨음을 말하며 길을 다닙니다. 수 킬로미터씩 방방곡곡에서 오두막 사이를 누비고 다니며 새로운 학생들이나, 어려움에 처한 엄마들을 찾아다니고, 복병이나 맹수들이 숨어있는 위험에도 아랑곳없이 예수님을 선포하며 영혼들을 회개시키고자 했습니다. 먼 거리나 밤에 홀로 걷는 것도 두려워하지 않고... 손에는 묵주를 들고 길을 갔습니다...

밤이면, 할 수 있을 때는 촛불 아래서 가족들에게 아름다운 편지를 썼습니다. 1924년에는 어린 여동생 안토니에타도 꼰솔라따 선교회의 수녀로 입회한 것을 알게 됩니다. 그 밖의 다른 여동생들은 모두 결혼합니다. 그녀는 자신을 위해서만 편지를 쓰지 않았습니다. 멀리 있는 가족과 친지들에게 소식을 보내달라고 청해오는 자신이 돌보는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서도 편지를 썼습니다. 모든 이에게 열정적인 문구의 편지를 보내며, 참으로 서간 사도직을 실천하면서 편지를 통해 모성 가득하면서도 확고한 조언을 줍니다. “그 친구들을 멀리하세요. 그들의 재물은 하느님에게서 오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을 가지려 하지 마세요. 그렇게 한다면 여러분은 하느님의 은총을 잃게 될 것입니다.”

획기적인 회개

아프리카에서 수년을 보내며, 이레네 수녀는 수많은 영혼들을 회개시키고 세례를 주었습니다. (모두 약 4천 명 가량) 그들 중에는 티로와 왕귀라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티로는 그 지역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 중의 한 사람이며 선교사들에 대한 반대를 주도하던 마법사 므와레리의 아들이었습니다. 아버지는 티로에게 그가 보기에 누구든 속여 넘길 마법을 쓰는 그 수녀와 대화를 나누는 것을 금지시켰습니다. 그러나 티로는 아버지의 조언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 오히려 학교를 다니며 쓰고 읽는 것을 배웁니다. 그러나 티로는 일 때문에 나이로비로 가게 되었습니다. 나이로비에서는 한 이슬람교도인 상사가 돈을 벌고 성공하려면 자신의 신앙을 따르라고 그를 압박합니다. 이레네 수녀는 포기하지 않고 열심히 기도하며 티로에게 편지를 하는데, 이에 감동한 티로는 되돌아와서 1928년 성탄 전야에 세례를 받은 후 이듬해에는 사제가 되기 위해 신학교에 들어갑니다.

왕귀는 또 대추장 왐보고의 손녀였는데, 추장은 그녀를 결혼시키고자 합니다. 그러나 왕귀는 결혼할 생각이 없었으며, 그보다는 세례를 받고 그리스도인이 되고자 합니다. 그녀가 그 뜻을 이룰 수 있었던 것은 병이 들어 만일 자신이 나으면 선교를 하러 떠나겠노라는 약속을 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그렇게 되어, 이레네 수녀는 세콘디나라는 이름으로 그녀에게 세례를 줍니다. 그의 가족들은 그것을 바라지 않았지만, 그녀는 그들에게는 “배반”으로 여겨질 수 있는 여정을 따릅니다. 그녀는 결코 포기하지 않고 “거룩한 오두막”에 틀어박혀 자신의 뜻이 이루어지지 않을 바에는 차라리 굶어죽도록 자신을 내버려두라고 가족들을 협박합니다. 왕귀는 꾀를 쓴 것입니다. 일이 그렇게 될 경우, 그녀의 부족에서는 마을 전체가 부정을 탄다고 믿는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세콘디나의 희망은 이루어집니다. 그녀는 오두막에서 나와 원죄없으신 성모님의 아프리카 수녀회에 입회합니다.

목숨을 바쳐

1930년 9월 14일 이레네 수녀는 느예리를 향해 떠납니다. 그녀는 느예리에서 연례 영신수련에 참석하여, 자신의 모든 삶을 되돌아보는데, 그녀의 마음 안에서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죄는 예수를 다시 십자가에 못 박는다. 단 하나의 죄보다 수많은 죽음이 낫다.”

“모든 것을 잊으라... 우리 자신을 비우도록 하라.”

“선교사는 사도이며, 동정인이며 순교자이다.”

그 무엇이 곧 다가올 그녀의 앞날을 예견했던가요? 그렇게 그녀의 봉헌생활은 무르익습니다. 벌써 오래전부터 그녀를 괴롭히던 생각은 선교의 선익을 위해, 영혼들의 구원을 위해서는 지금까지 해왔던 것처럼 일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생각이었습니다. 자신의 삶을 바치고 싶었지만 장상에게 청해야 했으며, 장상은 그것을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이레네 수녀는 다시 일하기 시작했습니다. 10월 15일 장상은 그녀에게 두 명의 젊은 수녀들이 큰 병에 걸렸다는 것을 알려 주는데, 이레네 수녀는 또다시 시도합니다. “원장 수녀님, 제가 그들을 위해 목숨을 바칠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십시오. 그들은 젊고 아직 좋은 일을 많이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죽는 것이 더 쓸모가 있을 것입니다. 제게 허락해 주십시오...”

장상은 동의를 거부합니다. 그러나 선교 사업에 대한 얘기가 나왔을 때, 이레네 수녀는 다시 한 번 시도합니다. “제가 하느님 뜻을 하도록 허락해 주십시오. 제가 주교님을 위해, 선교 사업을 위해 제 보잘 것 없는 무익한 삶을 희생할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십시오...” 장상은 더 이상 그녀의 청을 거부할 수 없었습니다. 이레네 수녀는 기뻐했습니다.

게콘디에서 전염병이 창궐하였을 때 이레네 수녀는 그 최일 선에 나섭니다. 2주 후, 자신의 품에서 죽어가던 환자를 돌보다가 그 병을 옮게 됩니다. 그 환자는 그녀를 반대하는 움직임을 주도하며 학교에서 그녀를 몰아내려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무엇이 문제이겠습니까! 이레네 수녀는 마치 예수님이 그렇게 하셨을 것처럼 당장 달려가 그를 돌보았습니다.

1930년 10월 26일 일요일은 그리스도왕 대축일이었습니다. 이레네 수녀는 미사에서 기도를 지휘하는 도중 오싹하며 뼈가 얼어붙는 듯한 한기를 느낍니다. 그녀는 자리에 눕습니다. 자신의 삶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알지만 그녀에게 병문안을 와서 울고 있는 몇몇 여인들에게 말합니다. “나를 위해 울지는 마세요. 이제 나는 천국으로 가요.”

밤새 그녀를 간호하던 마르가리타 수녀는 그녀에게 한 가지 새로운 기도를 제안합니다. “사랑의 희생자 예수 성심이시여, 당신을 위해 저를 깨끗하고 성스러우며 하느님께 기꺼운 제병이 되게 해 주소서.” 이레네 수녀는 여러 차례 그 기도를 반복합니다. 1930년 10월 31일, 이레네 수녀는 예수, 마리아, 요셉의 이름을 부르며 선종합니다.

냐아타

이레네 수녀가 돌보던 환자들과 그녀가 늘 미소를 머금고 모든 사람들을 사랑하면서 언제든 도와줄 준비가 되어 이곳저곳을 누비고 다니던 것을 목격했던 게콘디 사람들에게 이레네 수녀는 느야아타입니다. 느야아타는 그곳 언어로 “자비로운 어머니”라는 말입니다.

1956년과 1961년, 꼰솔라따의 잔파올라 미나 수녀에 의하면 이레네 수녀를 알던 사람을 인터뷰하고 그녀에 대한 자료를 모으러 가는 직책을 맡고 케냐에 갔을 때, 많은 이들이 애정을 갖고 이레네 수녀를 기억하고 있었다고 했습니다. 그들은 1983년 그녀가 그 때 이미 나와 있던 이탈리아어로 된 전기 같은 것을 키쿠유어 책으로 집필하는 것을 도와주었습니다.

최근에서야 세례를 받은 한 노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는 복음을 믿었습니다. 그 행적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또 다른 사람은 이렇게 증언했습니다. “우리는 그분의 말을 그대로 믿었습니다. 그분의 사랑을 손으로 만지듯이 느꼈기 때문입니다.” 한 수녀는 이레네 수녀의 죽음에 대해 이야기하며 심지어 이런 말을 덧붙였습니다. “이레네 수녀님은 병으로 돌아가신 것이 아닙니다. 그분은 사랑으로 희생되셨습니다.”

영광의 신발

신발은 어느 정도 이레네 수녀가 살아생전에 영혼들을 구하기 위해 했던 수많은 달음박질을 상징합니다. 그 먼지 묻고 많이 신어 해진 신발은 때와 시간을 가리지 않고 밤낮으로 그녀가 다녔던 수 킬로미터의 증언으로 남아 있습니다.

끊임없는 복음의 전도자였던 이레네 수녀는 영혼을 구하기 위한 기회를 놓치지 않았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아티암보 이야기가 의미심장합니다. 어느 날 이레네 수녀는 아티암보에게 세례를 주겠다고 약속했었는데 찾을 수 없었습니다. 그 전날 보았을 때 그는 아직 죽음의 문턱에 있지는 않은 것 같았는데도 말입니다. 이것저것을 묻다가 이레네 수녀는 그가 죽어가는 것 같이 보이자, 사람들이 그를 시체를 버리는 해변에 가져다 놓아 바다에게 “치워줄 것을 맡겼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녀는 즉시 그를 찾으러 바다에 가서는 산더미처럼 쌓인 시체 사이를 뒤져 거의 생명이 꺼져가는 그를 발견합니다. 이레네 수녀는 그를 병원으로 데려가서 간호하고, 마침내 그에게 세례를 주었습니다.

그녀에게 아티암보를 찾기 위해 옮긴 그 모든 시체들을 건드리면서 진저리가 나지는 않았는지 묻는 모레스코 수녀에게 이레네 수녀는 이렇게 답했습니다. “정말 그랬어요. 하지만 나는 그의 영혼만을 생각했어요. 그 어떤 값을 치르고서라도 영혼을 구할 필요가 있어요.” 그녀의 영웅적인 행적의 비결이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물의 기적

모잠비크의 니페페. 1989년 1월 10일 새벽 미사 동안 총탄의 화약 내음이 나며, 무력 포위가 시작되면서 피비린내 나는 내란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죽습니다.

미사 참례를 위해 모인 사람들과 교구의 교리교사들 및 활동가들과 그들 가족들을 외에 다른 사람들도 학살을 피해 교회로 피신합니다.

많은 어린이들을 포함하여 약 260명의 사람들이 연중 가장 뜨거운 시기에 교회 안으로 급히 모여들었습니다. 이들은 3일 동안을 살해의 위협 속에서 억류되어 있었습니다. 달리 물을 얻을 방법이 없었기 때문에 선교에 두각을 나타내는 인물이었던 교리교사장 베르나르도 브와나잇사는 모두가 살아남기 위해 세례반의 물을 이용할 것을 허용합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그 누구도 감히 “세례수를 마시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 세례반은 나무 둥치를 판 것으로 갈라진 틈이 여러 군데 있어서 물이 많이 새어나가곤 했습니다. 그 파낸 나무둥치 안에는 4리터에서 많아도 6리터의 물 이상은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레네 수녀에게 청하고는 3일 반나절 동안 교회에 피난한 모든 사람들에게 마실 물이 충분히 있었습니다. 그저 마실 물만이 아니라 땀을 식히고 그 상황에서 태어난 아기를 씻길 물도 있었습니다. 그 아기는 이레네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습니다.

죽기 한 해 전, 교리교사장인 베르나르도는 주교에게 그 3일 동안 모두가 카리타스의 마른 비스킷 몇 개를 먹고, 세례수를 마시며 살아남았다는 증언을 되풀이했습니다.

“물을 만들어 내는 나무 같았습니다.” 당시 어린이였던 생존자 한 사람은 이렇게 확인해 주었습니다. 증언들은 일치하며, 목숨을 구하려고 교회로 피신했던 이슬람교도들도 증언을 했습니다.

한편 불가리아의 교수 크라스티오 안드레예프 파나요토프는 당시 그곳에 있던 모든 사람이 단 한 잔씩만 물을 마셨다 하더라도 200리터로도 모자랐을 것이라는 계산을 했는데, 반면 그 세례반은 최대 6리터 정도 밖에 물을 담을 수가 없습니다!

게다가, 니페페에서 일어난 일을 전혀 몰랐던 교리교사 세바스티아노 아라나는 그의 아내와 아들이 피난을 간 것을 알게 됩니다. 꿈에서 그에게 한 백인 수녀가 나타나 이렇게 그를 안심시킵니다. “안심하세요! 당신의 아내와 아들은 잘 있고 집으로 돌아오게 될 거예요.” 또한  수녀는 그와 공동체 사람들에게 주님의 기도를 드린 후 다음의 기도를 드릴 것을 제안했습니다. “주님은 항상 나의 목자이십니다. 주님은 언제나 사람들을 인도하십니다.” 아내와 아들은 그 며칠 간 피난했던 다른 모든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무사히 집으로 돌아왔으며, 법정에서 세바스티아노는 강한 확신을 갖고 그날 이후로 항상 계속해서 그 기도를 드린다는 말을 덧붙였습니다. 이레네 수녀의 보호를 믿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제단에서의 영예를 향하여

1984년 9월 느예리의 주교인 체사레 가티무 몬시뇰은 이레네 수녀의 시복을 위한 교구 심사를 시작했습니다. 10월 19일에는 토리노에서도 대주교 아타나시오 발레스트레로 추기경이 같은 절차를 시작하여, 이 심사는 1988년 10월 1일 마무리되었습니다.

바로 2011년 2월 15일, 알라마노 복자 기념일 전야에 교황청 시성성의 추기경과 주교들의 회합에서는 조사를 거쳐 하느님의 종 이레네 스테파니 수녀가 행한 미덕의 영웅성을 선포하는 것에 대한 긍정적인 견해를 알려줍니다. 그 후 주교들과 추기경들의 발의에 따라 교황 베네딕토 16세는 그녀를 “가경자”로 선포하는 교령을 인준합니다. 그것은 이레네 스테파니 수녀에게 드린 전구로 이루어진 기적이 고려된 것입니다. 모잠비크의 니앗사, 리칭가 교구의 니페페 본당 세례반에 담긴 물이 불어난 기적을 말합니다.

드디어 창설자인 알라마노 복자에게 헌정된 해인 2014년에 교황의 승인으로 심사 절차 단계가 마무리 되고 시복의 길이 열렸습니다. 실제 올해 6월 12일 교황 프란치스코는 꼰솔라따의 선교사 이레네 스테파니 수녀의 시복을 위한 교령 반포를 인가했고 내년 5월 23일 시복식을 허락했습니다.


<동영상>

꼰솔라따 선교 수녀회 속하신 이레네 스테파니 수녀님의 시복식 - 2015년 5월 23일 - 케냐 니에리

Posted by Consolata Missionaries Korean Delegation on Thursday, May 21,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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