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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사순 시기 담화 - 프란치스코 교황 성하

by admin posted Feb 25,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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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분께서는 가난하게 되시어 우리가 그 가난으로 부유하게 되도록 하셨습니다
(2코린 8,9 참조)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사순 시기를 맞이하여 저는 개인과 공동체로서 걸어가는 회개의 길에 관하여 여러분에게 몇 가지 생각을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저의 이러한 생각은 바오로 성인의 말씀에서 영감을 얻었습니다. “여러분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을 알고 있습니다. 그분께서는 부유하시면서도 여러분을 위하여 가난하게 되시어, 여러분이 그 가난으로 부유하게 되도록 하셨습니다”(2코린 8,9). 바오로 사도는 곤궁에 빠진 예루살렘 신자들을 아낌없이 도와줄 것을 독려하고자 코린토의 그리스도인들에게 편지를 썼습니다. 바오로 성인의 이 말씀은 오늘날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어떠한 의미가 있습니까? 가난해지라는 초대, 곧 복음적으로 가난하게 살라는 이 초대는 오늘날 우리에게 무엇을 의미합니까?

 

그리스도의 은총

 

이 말씀은 무엇보다도 하느님께서 일하시는 방식을 보여줍니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의 힘 있고 부유한 모습이 아니라 약하고 가난한 모습으로 당신을 드러내셨습니다. “그분께서는 부유하시면서도, 여러분을 위하여 가난하게 되시었습니다.” 영원한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며 아버지와 같은 권능과 영광을 지니신 그리스도께서는 가난해지셨습니다. 그분께서는 우리 가운데 내려오시어 우리 한 사람 한 사람 곁으로 다가오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당신 영광을 벗으시고 자신을 비우시어 모든 면에서 우리와 똑같이 되셨습니다(필리 2,7; 히브 4,15 참조). 하느님께서 사람이 되신 것은 놀라운 신비입니다! 이는 모두 하느님 사랑 때문입니다. 이 사랑은 은총이고 너그러움이며 가까이 하려는 열망입니다. 이는 사랑하는 이들에게 망설이지 않고 자신을 내어주고 희생하는 사랑입니다. 사랑은 모든 것을 사랑하는 이와 나누는 것을 말합니다. 사랑은 서로 닮게 하고 평등을 낳으며 장벽을 허물고 간격을 없앱니다. 바로 이 사랑을 하느님께서는 우리와 함께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인간의 손으로 일하시고 인간의 정신으로 생각하시고 인간의 의지로 행동하시고 인간의 마음으로 사랑하셨습니다. 동정 마리아에게서 태어나시어 참으로 우리 가운데 한 사람이 되셨으며, 죄 말고는 모든 것에서 우리와 같아지셨습니다”(사목 헌장 22항).

 

예수님께서 가난하게 되신 것은 가난 그 자체에 있지 않고, 바오로 성인의 말씀처럼 “여러분이 그 가난으로 부유하게 되도록”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이 말씀은 결코 말장난이나 구호가 아닙니다. 오히려 이 말씀은 하느님의 논리, 곧 사랑의 논리, 강생과 십자가의 논리를 담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동정하는 마음에서 풍족한 가운데 자선을 베푸는 사람처럼 우리에게 구원을 하늘에서 그냥 내려주신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은 그러한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요르단 강에 들어가시어 세례자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신 것은 당신께서 참회나 회개가 필요해서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용서가 필요한 이들과 죄를 지은 이들 가운데 계시고자, 그리고 우리의 죄를 몸소 짊어지시고자 그리하셨던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로하시고 구원하시며 비참에서 벗어나게 해 주시고자 택하신 길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부요가 아니라 그 가난으로 자유롭게 되었다는 바오로 사도의 말씀은 놀랍습니다. 바오로 성인은 “만물의 상속자”(에페 1,2)이신 “그리스도의 헤아릴 수 없는 풍요”(에페 3,8)를 잘 알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해방시키시고 부유하게 해 주시고자 택하신 이 가난은 무엇입니까? 이는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는 방식입니다. 곧 길가에 초주검으로 버려진 사람에게 이웃이 되어준 착한 사마리아인처럼(루카 10,25 이하 참조)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이웃이 되어 주시는 방식입니다. 우리에게 참된 자유, 참된 구원, 참된 행복을 주는 것은 그리스도의 사랑, 자비롭고 온유하며 연대하는 사랑입니다. 우리를 부유하게 해 주시는 그리스도의 가난은 그분께서 사람이 되신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나약함과 죄를 짊어지시고 우리에게 하느님의 무한한 자비를 전해주신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가난은 가장 큰 부요입니다. 예수님의 부요는 하느님 아버지를 무한히 신뢰하고 늘 그분께 의지하며, 언제나 아버지의 뜻과 영광만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부모의 사랑을 느끼며 부모를 사랑하고, 그 사랑과 보살핌을 단 한 순간도 의심하지 않는 아이처럼 예수님께서는 부유하십니다. 예수님의 부요는 그분이 아드님이시라는 데에 있으며, 아버지와 맺으신 유일한 관계가 이 가난한 메시아의 최고 특권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분의 “편안한 멍에”를 지라고 우리를 초대하시는 것은, 그분의 “부유한 가난”과 그 “가난한 부요”로 우리가 부유하게 되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아드님이시며 형제이신 그분의 영을 나누라고, 아드님 안에서 자녀가 되고 형제들 가운데 맏이이신 분 안에서 형제자매가 되라고 초대하시는 것입니다(로마 8,29 참조).

 

레옹 블로와(Leon Bloy)는 단 하나의 진정한 슬픔은 성인이 못되는 것이라고 말하였습니다. 마찬가지로 단 하나의 진정한 비참은, 하느님의 자녀이며 그리스도의 형제자매로 살아가지 못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의 증언

 

이 가난의 “길”이 예수님께만 해당되는 길이라고 생각하여, 그분을 따르는 우리는 인간에게 적당한 방법들로 세상을 구할 수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언제나 어디에서나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의 가난을 통하여 인류와 세상을 구원하고 계십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성사들 안에서, 당신의 말씀 안에서, 그리고 가난한 이들의 백성인 당신의 교회 안에서 몸소 가난하게 되십니다. 하느님의 부요는 우리의 부요를 통하여 전해지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그리스도의 영에 힘입어 실천하는 우리의 개인적이고 공동체적인 가난을 통해서만 전해집니다.

 

우리 주님을 본받아,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형제자매의 빈곤을 살펴보고 어루만지며, 그것을 우리의 것으로 받아들여 그 짐을 가볍게 해 주고자 구체적인 활동을 하라는 부르심을 받고 있습니다. 빈곤가난과 같은 것이 아닙니다. 빈곤은 믿음과 연대와 희망이 없는 가난입니다. 우리는 빈곤을 세 종류로 나눠볼 수 있습니다. 곧 물질적, 도덕적, 영적 빈곤입니다. 물질적 빈곤은 보통 가난이라고 부르는 것으로, 인간 존엄을 거스르는 상황 속에 살아가는 모든 이에게 영향을 줍니다. 곧 식량, 물, 위생, 일자리, 개인적으로 발전하고 문화적으로 성장할 기회와 같은 기본적인 권리와 필요를 박탈당하는 것입니다. 이 빈곤에 맞서 교회는 도움을 주면서, 곧 봉사(diakonia)를 하면서 그러한 필요를 충족시키고, 인류의 모습을 훼손시키는 그 상처들을 감싸주고자 합니다. 우리는 가난한 이들과 소외된 이들에게서 그리스도의 얼굴을 봅니다. 가난한 이들을 사랑하고 도우면서 우리는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섬기는 것입니다. 우리는 또한 흔히 빈곤의 원인이 되는 인간 존엄의 침해와 차별과 폭력이 세상에서 없어지도록 더욱 노력하고자 합니다. 권력과 사치와 돈을 우상화하면 부의 공정한 분배의 필요성을 등한시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마음을 다잡고 정의와 평등, 검소함과 나눔을 향하여야만 합니다.

 

도덕적 빈곤은 사람들을 악과 죄의 노예로 만드는 것으로, 물질적 빈곤만큼 걱정스럽습니다. 얼마나 많은 가정이 알코올, 약물, 도박, 음란물에 중독된 일부 가족, 특히 자녀들 때문에 고통을 겪고 있습니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하고, 미래에 대한 전망도 없이 희망을 잃고 살아가고 있습니까! 또한 불의한 사회 상황, 집안의 생계를 책임지는 사람의 존엄을 빼앗아가는 실업, 공평한 교육과 의료 혜택의 부재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 도덕적 빈곤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습니까! 이러한 상황에서 도덕적 빈곤은 자살로 이어질 수도 있습니다. 이러한 형태의 빈곤은 경제적 붕괴도 일으키며, 우리가 하느님에게서 멀어지고 그분 사랑을 거부할 때 빠지게 되는 영적 빈곤으 로 반드시 이어집니다. 우리가 스스로 해 낼 수 있다고 자신하여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에게 손을 내미시는 하느님이 필요 없다고 생각할 때, 우리는 몰락의 길로 접어드는 것입니다. 오직 하느님께서만 우리를 진정으로 구원하시고 해방시켜주십니다.

 

복음은 영적 빈곤의 참된 해결책입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어디에서든지 이 해방의 소식을 선포하도록 부르심을 받고 있습니다. 이는 우리가 저지른 악행을 용서받을 수 있다는 소식,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죄를 없애주는 위대하신 분으로 늘 우리를 아낌없이 사랑하신다는 소식입니다. 또한 우리가 친교와 영원한 생명을 받고 태어났다는 소식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이 자비와 희망의 메시지를 기쁘게 전하는 사람이 되라고 요청하십니다! 상처받은 마음을 달래고 어둠 속에 있는 우리 형제자매에게 희망을 주고자 이 기쁜 소식을 전하는 즐거움, 우리에게 맡겨진 이 보화를 나누는 즐거움을 누리는 것은 가슴 벅찬 일입니다. 이는 예수님을 따르며 닮는 것을 의미합니다. 지극한 사랑으로 잃어버린 양을 찾아 나서는 목자처럼 예수님께서는 가난한 이들과 죄인들을 찾아 나서셨습니다. 우리는 예수님과 하나 되어 복음화와 인간 증진의 새로운 길을 용감하게 열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이 사순 시기에 교회 전체가 물질적, 도덕적, 영적 빈곤 속에 살아가고 있는 모든 사람에게 복음 메시지를 증언할 준비를 하기 바랍니다. 이는 모든 사람을 그리스도 안에서 감싸 안을 준비가 되신 자비로운 아버지의 사랑을 전하는 것입니다. 가난하게 되시어 우리가 그 가난으로 부유하게 되도록 하신 그리스도를 닮는다면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사순은 금욕하기에 좋은 시기입니다. 우리의 가난으로 다른 사람을 돕고 부유하게 만들기 위하여 우리가 무엇을 포기할 수 있을지를 스스로 물어보도록 합시다. 진정한 가난은 아프다는 것을 잊지 맙시다. 이러한 차원의 참회 없이는 그 어떤 금욕도 참된 것이 될 수 없습니다. 저는 아무런 희생도 따르지 않고 아픔이 없는 자선을 신뢰하지 않습니다.

 

성령에 힘입어 우리는 “가난한 자같이 보이지만 실은 많은 사람을 부유하게 합니다. 아무것도 가지지 않은 자같이 보이지만 실은 모든 것을 소유하고 있습니다”(2코린 6,10 참조). 바로 이 성령께서 우리의 결심을 굳게 하여 주시고 우리가 인간의 빈곤에 대한 관심과 책임을 키우도록 도와주시어, 우리가 자비로워지고 또 자비롭게 행동할 수 있게 해 주시기를 빕니다. 이러한 희망으로 저는 또한 모든 신자 한 사람 한 사람과 모든 교회 공동체가 사순 시기를 풍요롭게 지내시기를 기도합니다. 여러분 모두 저를 위하여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주님께서 여러분을 축복하시고 동정 마리아께서 여러분을 지켜주시기를 기도합니다.

 

바티칸에서
2013년 12월 26일
성 스테파노 첫 순교자 축일에
프란치스코